그래서 정치인들의 반발을 샀다. 남북전쟁 후의 사회적 가식과 위선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그를 겉보기만 번드르르한 ‘도금 정치인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어느 날 그가 칼럼을 통해 ‘모든 미국 정치인은 개자식이다’라고 일갈하자 항의와 사과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그는 ‘어떤 미국 정치인은 개자식이 아니다’는 문장으로 절묘하게 응수했다.
번뜩이는 위트와 수준 높은 골계미는 그의 문학 곳곳에서 빛난다. ‘미시시피 3부작’으로 꼽히는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미시시피강의 추억》에서도 그렇다. 인간 본성에 숨은 폭력과 어리석음을 그 대척점에 있는 웃음으로 빚어내는 재주가 놀랍다. 그의 기발한 표현을 따라 한참 웃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 내면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고 움찔 놀라게 된다.
그가 미국식 구어체 영어를 쓴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전까지 미국 작가들은 대부분 영국식 문어체를 사용했다. 영국문학의 그늘에서 벗어나 미국 소설의 어법을 최초로 정립한 게 그다. 그 덕에 “미국적인 경험과 이상을 최초로 미국 형식으로 소설화한 작가” “유럽에 비해 역사가 짧은 미국문학을 국민문학 단계로 높인 작가”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유머의 숨겨진 원천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천국에는 유머가 없다”고 말했다. 그 ‘슬픔’의 원천 중 하나는 그가 나고 자란 미시시피강이다. 미국 중북부에서 남쪽 멕시코만까지 6210㎞에 걸친 이 강은 31개 주에 물을 공급하는 ‘문명의 젖줄’이다.
이 강변의 미주리 주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해니벌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했다. 열두 살 때 아버지가 폐렴으로 세상을 뜨자 학교를 그만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후 인쇄소 견습공을 거쳐 미시시피강 증기선의 견습 수로안내원이 된 그는 보이지 않는 암초를 피해 배를 안전하게 모는 방법을 배웠다. 강의 수심을 정확히 읽는 노하우도 익혔다. 그의 필명 마크 트웨인은 배가 지나가기에 안전한 수심인 ‘두 길 물속’을 뜻한다. 그는 본명인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보다 필명을 좋아했다.
하트퍼드15년간의 이 경험은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됐다.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대한 영감을 얻은 곳도 이 강변이다.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지자 강을 오가던 선박 통행이 중지됐다. 그는 서부로 갔다. 그곳에서 ‘칼라브라스 카운티의 뜀뛰는 개구리’라는 단편을 써서 이름을 알렸다.
캘리포니아 광산촌에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이 단편은 순진해 보이는 한 외지인이 유명한 개구리 경주자를 속여 내기에서 이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형적인 서부 유머로 엮은 이 작품은 정교한 구성에다 감정 이입과 분리가 탁월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의 유머 감각은 데뷔작부터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렇다고 그의 문장에 웃음기만 배어 있는 건 아니다. 삶에 대한 지혜와 짙은 페이소스도 스며 있다. 60세 때인 1895년 파산 상태에서 강연을 위해 12개월간 배를 타고 세계를 한 바퀴 돌았던 그는 “우주의 별빛이 지구에 도착하는 속도와 거리를 계산하면 내 여행 코스가 1분30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없이 겸손해졌다”고 말했다.
75세를 일기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독자 3000여 명이 장례식장을 찾아 한 시대의 성찰과 해학을 기리며 애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는 그의 110주기다. “우리가 죽었을 때 장의사조차 슬퍼할 정도로 인생을 살라”던 그의 말이 21세기 정치인들의 가슴에는 어떤 물무늬를 새길지 궁금하다.
주식·발명·사업 실패…좌절에서 핀 '웃음의 미학'
마크 트웨인은 주식 투자와 발명, 사업에 모두 실패했다. ‘골드 러시’ 때 그는 광맥을 찾아다니며 광산회사 주식에 집중 투자했다. 주가는 한동안 치솟았다. 그러나 금광이 바닥났다는 소문에 폭락을 거듭했다. 위험한 ‘테마주’에 ‘몰빵’했다가 재산을 다 날린 그는 다음과 같은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인생에서 투기를 하지 말아야 할 때가 두 번 있다. 한 번은 여유가 있을 때고, 또 한 번은 여유가 없을 때다.”
그는 발명에도 관심이 많아 여러 가지 특허를 얻었지만 돈을 벌지는 못했다. 여성 브래지어의 후크를 발명한 사람이 그다. 아내가 끈으로 묶는 브래지어 때문에 고생하는 것에서 착안해 특허까지 취득했다. 하지만 당시는 코르셋이 대세여서 시장에서 외면받았다.
교류전기의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와 친하게 지내면서 ‘풀 없는 신문 스크랩북’이나 ‘보드게임’ 등을 발명했으나 이 역시 팔리지 않았다. ‘페이지 식자기’(자동으로 식자할 수 있는 인쇄기)에 30만달러를 투자했다가 비슷한 기계가 먼저 개발되는 바람에 쪽박을 차기도 했다. 그 와중에 자신이 운영하던 출판사마저 파산했다.
그는 훗날 “난 작가로 20년 살고, 바보로 55년을 살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실패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었다. 그러면서도 “실패할까봐 늘 두려웠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며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 극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숱한 좌절 속에서 ‘웃음의 미학’을 꽃피운 원동력도 이런 마음가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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