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 정치부 기자) 한반도 평화 및 북한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가장 주목받는 북측 인사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다. ‘로켓맨’이라 불리던 그는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존재감을 전세계에 과시했다. 이복형인 김정남을 암살한 배후로 지목받던 ‘폭군’에서 북한의 경제재건을 위해 팔을 걷어부친 ‘젊은 지도자’로 일약 변신했다.
김정은 다음으로 주목할 인물로 전문가들은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꼽는다. 군부 출신으로 천안함 폭침의 장본인이기도 한 김영철이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최근 비핵화 협상 교착의 원인도 상당 부분 그의 입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영철은 올 초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던 시점부터 ‘설계자’로 나선 인물이다. ‘4·27 판문점 선언’이 있기 전, 남북과 미국 간 고위급 접촉의 최고위 대표였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CIA 수장이던 시절로, 우리측 파트너는 서훈 국가정보원장이었다. 폼페이오가 CIA에서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미국의 대북 창구는 기존 관례에 따라 국무부로 넘어왔다. 정보 라인에서 외교 라인으로 이관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해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대미 관계를 맡고, 남북 관계는 통일부가 전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은 예외였다. 김영철은 여전히 남북 및 미·북 협상의 배후이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김영철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8월의 ‘김영철 협박편지’다. 당시 네 번째 방북을 준비하고 있던 폼페이오 장관은 김영철의 호전적인 편지를 받고는 방북 일정을 취소했다. 김영철은 미국에 보낸 편지에서 ‘북한에 새로운 걸 줄 게 없다면 평양 문턱을 넘을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초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폼페이오와의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회담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김영철이었다.
김영철은 북한 입장에서 협상의 위기라고 판단될 때 판을 흔들어 협상력을 제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김정은의 연내 답방이 사실상 무산되고, 2차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엔 김정은이 서울에 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최근의 상황과 관련해서 김영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김영철은 김정은의 하수인일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의 의중이 김영철에게 반영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정은의 권력 기반은 아직 무소불위라고 하기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2012년 공식으로 김정일 후계로 나선 지 채 10년이 안됐다. 고모부이자 친중파의 수장인 장성택을 숙청하고, 이복형을 암살하는 등 초기 권력 누수 현상을 극복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 과정의 핵심이 군부고, 김영철은 군부를 대표하는 권력 실세다.
김영철이 남북 및 미·북 협상에서 끝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도 그가 군부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핵과 제재완화를 맞교환하는 방식의 이번 북핵 협상에서 핵을 개발하고 관리하고 있는 군부의 역할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김정은으로선 군부에 협상의 주도권을 맡겨야 향후 결과가 잘못되도 뒤탈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북한 군부가 현 상황을 ‘반쪽의 성공’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9·19 평양선언’에서 남북한 군사공동합의를 통해 사실상의 남북 종전에 합의하는 등 남한과의 관계는 성공이지만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은 손해만 봤다고 해석하고 있을 것이란 추론이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동창리 미사일발사기지 폐기 에다 지난 9월 평양에선 국제사회의 핵사찰까지 수용하겠다고 했음에도 미국을 비롯해 국제사회가 ‘완전한 비핵화(CIVD)’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6차 정상회담에서 미·북 정상회담 이전, 김정은의 서울 답방에 대해 공식 합의를 발표했음에도 김정은이 오랫동안 침묵하는 것은 김영철 및 군부의 반발과 무관치 않다. 김영철은 다시 한번 판을 흔들만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일본 국가안전보장국 고문이기도 한 미치시타 나루시게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GRIPS) 교수는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했다. “남북과 미국 모두를 통틀어 김영철만큼 비핵화 협상의 본질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은 없다”는 것이다.
6자회담이 한창이던 때 북한에서 외교관들이 막후 교섭을 하긴 했지만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다시 말해 북한이 핵무기를 실제 보유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북핵 협상의 실권은 군부로 넘어왔다. 미 당국자들 사이에선 “영변 핵사찰에 관한 미·북 협상이 진행될 때 북한 외무성 관료들조차 협상이 시작된 이후에야 영변에 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미치시다 교수는 또 하나 김영철에 대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김영철과 군부로선 현상황을 유지하는 이른바 ‘위험한 평화’를 선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더 이상 하지 않고, 미사일 발사도 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을 미치시다 교수는 ‘불확실한 평화’라고 표현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상태를 만든 걸 자신의 최대 외교 업적으로 치켜세우곤 한다. 이런 류의 평화는 주한미군 감축과 유엔사령부 철수 등의 논의가 나올 수 있는 자양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혹은 ‘불확실한’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김정은 스스로는 모를 수 있지만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도발한 주범인 김영철 같은 사람은 충분히 이런 상황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미치시타 교수의 경고다. 김영철이 군부 실세이자 통일전선부장이라는 점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남북은 12일 군사분계선(MDL)에 오솔길을 내고, 10개 GP 철수에 대한 상호검증을 시작했다. 우리는 김영철의 의중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끝) /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