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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베트남판(版) K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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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5월18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박정희 대통령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던 부탁 하나를 꺼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대가로 미국이 주기로 한 원조 대신 공업기술연구소 설립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최빈국 수준인 110달러. 당장 먹고사는 게 절박한 가난한 국가 지도자의 ‘과학기술 입국’ 열정에 존슨 대통령은 1000만달러를 흔쾌히 지원했다. 대한민국 과학 요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이렇게 탄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두 번은 KIST를 찾았다. 농림부의 거센 반대를 꺾고 약 125만㎡에 이르는 서울 홍릉임업시험장을 KIST 부지로 내줬다. “KIST 예산만큼은 자르지 말라”고 경제기획원에 엄명도 내렸다.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함께 대통령 월급보다 더 많은 봉급을 제공했다. 미국 보험회사와 계약해 당시 국내에 없던 의료보험까지 들어줬다.

KIST는 ‘과학기술 입국’ 취지에 맞춰 산업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산업화에 필요한 기술 개발이 목표였다. 기술을 개발한 뒤 수요자를 찾는 방식이 아니라, 수요자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연구하는 식이었다. KIST는 설립 초기 영업부를 두고 기업들에 연구 프로젝트를 팔러 다녔다.

출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대다수 기업들은 “일본에서 기술자 몇 사람을 데려오면 되지 연구는 뭐 하러 하느냐”고 했다. 하지만 KIST 기술 덕분에 기울어가던 기업들이 하나둘씩 살아나자 연구 의뢰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폐결핵 치료제 ‘에탐부톨’의 국산화, 전자식 교환기 장치 개발, 포항제철의 대형 일관제철소 건설 문제점 해결 등 걸출한 연구성과가 이어졌다. 기업들도 차츰 연구개발 중요성을 깨닫고 자체 연구소를 세웠다.

KIST는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 과학기술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생명과학연구소와 전자통신연구원 등 20여 개 전문연구소를 분가시켰고, 4500여 명의 석·박사급 인재를 키워냈다.

문재인 대통령과 베트남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어제 베트남 호아락 테크노파크에서 ‘한국-베트남과학기술연구원(VKIST)’ 착공식을 열었다. 한국과 베트남이 3500만달러씩 출연해 건립되는 VKIST는 KIST를 모델로 삼았다. VKIST라는 이름도 한국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베트남 정부가 정했다. KIST의 연구 및 운영 노하우가 그대로 전수된다. 금동화 전 KIST 원장이 초대 VKIST 원장을 맡았다. KIST가 한국의 과학기술 견인차가 됐듯이, VKIST가 베트남의 산업화 기수가 되길 기대한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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