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빛 아드리아해 따라 천년의 낭만이 흐른다
'꽃보다 누나'들이 사랑한 곳, '때묻지 않은 자연'에 취하다
발칸반도가 어디인지 궁금하다면 유럽지도를 펴놓고 이탈리아를 찾아보자. 유럽에서도 대표적 관광국가인 이탈리아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동쪽에 위치한 아드리아해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기면 생소한 이름의 작은 나라가 옹기종기 붙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지역이 바로 발칸반도다. 한때 ‘유고슬라비아’라 불린 이 지역의 중심 국가는 1990년대 초반, 발칸 내전이라는 큰 아픔을 겪으며 일곱 개의 나라로 분리됐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알 만큼 유명해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그리고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이 그 일곱 나라다. 과거의 아픔을 씻어내고 새롭게 도약하고 있는 이 지역은 아직까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색다른 문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단언컨대 유럽의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곳이다.
아드리아해의 하이라이트 ‘몬테네그로 코토르’
발칸반도의 많은 매력 중 하나는 아드리아해가 차지하고 있다.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에 흐르는 이 청아한 바다는 1년 내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며 쉴 새 없이 여행자를 유혹한다. 800㎞ 길이의 아드리아 해역을 따라 수많은 미항이 이어지는데 그중 몬테네그로 코토르는 단연 최고의 풍경을 자랑한다. 아름다운 바다뿐 아니라 낭만이 넘쳐 흐르는 구시가지 골목, 오랜 역사를 가진 중세 성곽이 도시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도시 중심에 있는 성문을 지나는 순간 중세시대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성문 안쪽엔 9세기에 지어진 성 트뤼푼 성당과 10세기에 지어진 성 루카 교회를 필두로 천년의 시간을 품은 건물이 즐비하고 15세기 무렵에 건설된 시계탑과 궁전이 솟아 있다. 정감 넘치는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붉은색의 지붕을 가진 옛 건물들이 몸을 부대끼며 여행자의 마음에 설렘을 안긴다. 문자 그대로 천년의 골목이라 불리는 코토르의 구시가지엔 중세시대에서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은 감동적인 풍경이 이어진다. 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에 아무런 이견을 달 수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옛 골목만이 코토르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구시가지에서부터 이어지는 바위산 꼭대기엔 몬테네그로 국기가 나부끼는 성곽 전망대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이야말로 코토르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다. 정상에 닿기 위해선 무려 1300여 개 계단을 올라야 하지만 한숨부터 내쉴 필요는 없다. 달랑 100걸음 정도만 올라가더라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발걸음에 힘을 실어 줄 만큼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방금 본 붉은빛 구시가지 너머로 아드리아해가 펼쳐지고 형형색색의 유람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에메랄드 위를 미끄러진다. 성벽을 따라 핀 보랏빛 꽃 사이로는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깜찍한 집들이 파도와 함께 넘실거린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바뀌는 놀라운 풍경을 눈에 담으며 오르다 보면 정상에 다다른다. 물론 온몸이 들썩거릴 만큼 거친 호흡이 잠시 동안 시야를 흩뜨려놓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면 지금까지의 산행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코토르의 완벽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거인이 던진 꽃이 호수가 되다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테레사 수녀의 고향으로 더 잘 알려진 마케도니아엔 발칸반도에 사는 이들에게조차 꿈의 휴양지로 통하는 호수 마을, 오흐리드가 있다. 오흐리드 호수엔 오래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이 꽤나 재미있다. 아주 먼 옛날 거인이 하늘에서 던진 꽃이 오흐리드에 닿아 호수로 변했다는 전설인데, 허무맹랑하게 들릴 법한 전설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호수의 모습이 수려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호수 전체가 거대한 유리판에 덮여 반짝이는 듯 물빛이 맑고 깨끗하다. 게다가 ‘바다처럼 넓은’이란 빤한 표현이 어울릴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마케도니아를 넘어 알바니아까지 이어지는 오흐리드 호수의 면적은 350㎢에 달하며 깊이는 290m에 이른다.
인구 5만의 작은 마을이지만 워낙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기에 호숫가에 자리 잡은 대부분의 가정집은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물가가 동남아시아만큼이나 저렴한 발칸반도이기에 보통 우리 돈 3만~4만원이면 전망 좋은 언덕 집을 통째로 빌릴 수도 있다. 언덕 위의 집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호수를 감상해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오흐리드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선 호수 앞에 펼쳐진 잔디밭까지 활동범위를 넓히는 것을 추천한다. 호수에 가까이 갈수록 순간을 즐기는 휴양객의 모습이 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일광욕을 즐기는 관광객의 모습도 보이고 반려견과 함께 호숫가를 거니는 현지인의 모습도 보인다. 호수를 따라 늘어선 벤치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수 위에 보트를 띄우고 낚시를 즐기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오흐리드 호수를 배경 삼아 저마다의 방식대로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에게나 그 여유가 고스란히 전염된다. 그래서 오흐리드는 휴양을 즐기기에 참 좋은 마을이다. 호수에 발을 담근 채 하릴없이 낚시꾼을 구경해도 되고, 지루해질 때쯤엔 산책 나온 마을 사람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나눠도 좋다.
뜨거운 발칸반도의 태양이 나른함을 안겨준다면 호숫가 잔디 위에 누워 낮잠에 빠져드는 것도 오흐리드를 한껏 즐기는 방법이다. 푸른 호수를 한껏 품었던 두 눈이 스르르 감길 때쯤이면 내일도 모레도 이러겠노라 절로 다짐을 하게 된다.
요정들의 숲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크로아티아는 최근 들어 서유럽을 위협할 만큼 발칸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로 발돋움했다. 한 나라 안에 다양한 매력을 가진 도시가 여럿 있기 때문인데, ‘꽃보다 누나’들이 열광했던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두브로브니크나 만화처럼 깜찍한 풍경이 이어지는 수도 자그레브, 세계 3대 미항에 끼워 넣어도 무리가 없을 항구도시 스플리트 등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런 쟁쟁한 후보들을 뒤로하고 개인적으로 크로아티아 최고의 풍경이라 생각하는 곳은 바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이다. 호수 16개와 폭포 100여 개가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 그래서 별명조차 ‘요정들의 숲’으로 붙은 곳인 플리트비체는 심지어 크로아티아 유일의 세계자연유산이다. 20만㎡에 이르는 거대한 국립공원이지만 감탄사가 터져 나오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공원에 입장함과 동시에 눈앞에 펼쳐지는 호수부터가 비현실적으로 투명하기 때문이다.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 둘째치고 호수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들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시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물이 맑다. 그 맑음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물속으로 뛰어들면 지금껏 지은 죄가 모두 씻겨 나갈 것만 같다. 하지만 수영은커녕 호수에 발을 담그는 것조차 금지돼 있다. 플리트비체가 빚어낸 순수한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방문객의 수영, 낚시, 취사가 금지되고 애완동물 출입까지 철저히 통제된다. 산책로와 표지판 등 공원 내 모든 시설물이 나무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공원엔 10여 개의 트레킹 코스가 존재하는데 2시간 코스부터 8시간 코스까지 자신의 체력과 기호에 맞춰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게 어느 코스를 선택하든 공평하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평의 호수와 수직의 폭포가 시원스레 몸을 섞으며 시각적 황홀함을 선사하고 그 풍경을 울창한 숲이 품고 있다. 그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폭포가 뿜어내는 청량감 넘치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시각적뿐만 아니라 분명 청각적으로도 아름다운 곳임을 느낄 수 있다.
아픔을 간직한 오래된 다리 ‘보스니아 스타리 모스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라는 외우기조차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이 나라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할 당시 북부의 보스니아 지역과 남부의 헤르체고비나 지역이 합쳐지며 독립국가가 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도 ‘인종청소’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 땅이라 다른 나라에 비해 여전히 전쟁의 상흔이 많이 목격되는 곳이다. 제2의 도시이자 독립 후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모스타르도 예외는 아니다. 시내 곳곳엔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고, 양지바른 곳엔 어김없이 희생자들의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다. 그러나 관광의 중심지인 구시가지는 많은 복원 작업을 거친 끝에 전쟁의 상흔이 희미해졌다.
이 구시가지가 독립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관광의 중심이 된 이유는 바로 네레트바 강 위에 솟아 있는 ‘스타리 모스트’ 때문이다. ‘오래된 다리’라는 뜻을 가진 석조 다리로 이름 그대로 1566년 오스만 제국 시절에 건설된 오랜 역사를 가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수식어까지 붙었는데 직접 마주하면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회색빛 벽돌로 지어진 아치형 다리는 마치 귀부인처럼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모습이며 그 너머로 웅장한 바위산이 더해져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이 아름다운 다리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한창이던 1993년, 크로아티아 포병에 의해 붕괴됐고 지금의 다리는 유네스코 지원을 받아 이전과 똑같이 복원된 것이다. 하지만 재건의 아픔은 전화위복이 됐고 스타리 모스트는 복원 이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엄청난 관광객을 불러 모으며 평화와 화합의 상징으로 의미 있게 부활했다.
구시가지 초입 언덕에서 바라보는 스타리 모스트와 옥빛 네레트바 강의 조합은 모스타르의 상징이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물론 오래된 다리가 모스타르의 모든 것이라 할 순 없다. 15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시민의 절반가량은 아직도 이슬람교를 믿고 있기에 도시 전체에 동양과 서양, 아시아와 유럽, 이슬람과 가톨릭의 모습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여행 정보
현재 발칸반도 국가로 이어지는 국내 직항편은 없다. 이탈리아 로마까지 직항을 이용한 뒤 육로를 이용해 슬로베니아로 들어가거나, 터키 이스탄불까지 직항으로 이동한 뒤 역시 육로를 이용해 불가리아로 들어가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다. 위에 언급된 일곱 나라는 원래 유고슬라비아라는 하나의 나라였기에 각국을 오가는 버스가 많아 육로 이동이 쉬운 편이다. 다만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여전히 앙금을 풀지 못해 양국의 왕래는 국경 검문이 까다롭다. 코소보는 2008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전 세계의 절반가량만 독립을 인정한 미승인국으로, 세르비아는 여전히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한국은 인정하고 있다.
일곱 나라 중 유로를 사용하는 나라는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3개국이다. 크로아티아(쿠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마르카), 세르비아(디나르), 마케도니아(디나르)는 각각 자국 화폐를 사용한다. 물가가 크게 오른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는 유럽 국가임에도 물가가 무척이나 싼 편이다. 동남아시아 정도의 물가 수준이라 생각하면 된다.
발칸= 글·사진 태원준 여행작가 sneed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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