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FTA 재협상 요구 외면한 정부
비통상이슈 발목…운신폭 좁아져
40조 투자약속 불구 실망스런 결과
최원목 <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지난달 29~30일 워싱턴DC 한·미 정상회담은 통상분야에서는 최악의 협상으로 기록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 이미 진행 중”임을 선언했다. 이를 부인하며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FTA 효과에 대한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미국 측의 입장은 이미 오래전에 확립됐다. 자동차, 철강 등 주력 제조업 분야에서의 FTA 시장개방으로 인해, 대한(對韓) 무역수지 적자가 누적돼 제조업 일자리 감소로 이어졌기에 이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 측의 대응논리는 여전히 동문서답이다. 서비스업과 투자 분야에서는 미국이 FTA 이익을 봤으니, 지금 체제 그대로 가자는 것이다. 청와대는 “한·미가 FTA 재협상에 합의했다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는 반박 브리핑까지 했다. 이번에 채택된 한·미 공동성명에는 “양국 간 무역에서 공정하고 공평한 경쟁조건을 증진”할 것과 “고위급 경제협의회 설치를 통해 산업협력을 증진”해 나갈 것을 언급해, 한·미 FTA 재협상 이슈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FTA는 미국에는 거친 협정이었고 우리는 무역적자가 지속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언론에 발표해 재협상을 공식화하고 말았다.
미국 측이 한·미 FTA 재협상을 선언한 것은 지난 4월부터다. 4월18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 방한해서 “한·미 FTA를 재검토(review)하고 개혁(reform)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미국이 모든 무역협정을 재검토할 수 있다는 기존입장을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축소해석하자, 4월27일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를 “재협상하거나 종료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상대국이 재협상하겠다는데 이를 굳이 재협상하자는 게 아니라는 아전인수격 해석을 내놓으니, 더 윗선에서 자국의 입장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마찬가지 행태가 되풀이된 셈이다. 미 측이 “재협상이 진행 중이다”는 인식을 표명한 데 대해 우리는 굳이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이런 우리 측의 ‘상대방 무시전략’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최소한 시간지연 효과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시간을 번 게 아니고 오히려 시간을 단축해버리는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한쪽이 FTA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데 다른 쪽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 FTA를 파기하는 수밖에는 없다. 한·미 FTA 자체가 한쪽 당사국이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는 권한을 규정하고 있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의 기질상 조만간 한·미 FTA 파기선언을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차라리 재협상을 수용하고, 재협상의 진행시기 및 타결조건에 대한 우리 측 기본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재협상에서 미국 측의 요구로 인해 깨지는 이익의 균형을 우리 측 요구사항으로 다시 맞추는 식으로의 재협상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선언했어야 했다.
정상회담의 의제로 FTA 재협상 이슈가 올라간 것부터가 잘못이다. 4월 미국 측의 재협상 의사표명을 우리 측이 수용하고 한·미 FTA 개정문제를 실무적으로 진행했다면, 이번 정상회담에서 FTA 문제가 거론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북핵문제, 주한미군 분담금 증액 문제 등 비(非)통상이슈들과 맞물려서 한·미 FTA 재협상 문제가 패키지로 논의될 수밖에 없게 됐다. 안보를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최악의 통상협상 구도 속으로 빨려들어간 셈이다.
안타까운 점은 미국이 한·미 FTA 재협상 이슈를 먼저 꺼내 안보와 통상이 분리 논의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음에도, 우리 측이 동문서답으로 일관해 정상회담에서 한꺼번에 모든 이슈가 쏟아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안보비용 분담금 증액 요청을 공식적으로 접수하고 방미 경제인단이 5년간 대미투자 및 미국산 구입에 40조원을 쓰기로 한 대가가 그것이니 초라한 통상외교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최원목 <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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