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ㅎ' 불규칙이 유난히 까다로운 이유는 형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경우가 있어서이다.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떼어 놓은 당상'이란 속담이 있다. 일이 확실해 조금도 틀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따 놓은 당상'이라고 해도 같은 말이다.
지난 호에서 ‘ㅎ’ 불규칙 용언에 대해 살펴봤다. 이 규정의 핵심은 ‘형용사의 어간 끝 받침 ‘ㅎ’이 어미 ‘-네’나 모음 앞에서 줄어지는 경우, 준 대로 적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바닷물이 정말 파랗다”란 말이 변형을 하면 ‘파랗고, 파랗게, 파랗지, 파랗던’처럼 바뀌다가 ‘파라네, 파란, 파라니, 파래, 파래졌다’ 식으로 받침 ㅎ이 탈락한다.
그 중에서도 어미 ‘-네’가 올 때 ‘파라네’가 원칙이지만, 사람들이 ‘파랗네’ 식으로도 많이 쓰는 현실을 반영해 이 표기 역시 맞는 것으로 인정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비슷한 활용 예인 “바닷물이 정말 파라니/파랗니?”라고 물을 때는 ‘파라니’만 맞는다. “머리카락이 참으로 까마오/까맣오.” 할 때도 받침이 탈락한 ‘까마오’만 인정된다. 즉 ‘파랗네’ ‘까맣네’와 달리 어미 ‘-니’나 ‘-오’ 등이 결합할 때는 본래대로 받침 ㅎ이 탈락한 표기만 표준 어법이란 얘기다. 따라서 사람들이 많이 쓰는 ‘파랗니? 노랗니? 까맣니? 동그랗니? 조그맣니?’ 같은 의문형 표기는 틀린 것이란 점을 알아둬야 한다.
‘꺼메지다’ ‘허예지다’의 표기 원리
ㅎ받침 형용사가 어미 ‘-아/-어’와 결합할 때 ‘-애/-에’로 나타난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가령 ‘노랗다’에 어미 ‘-어지다’가 붙으면 어떻게 될까. ‘노랗+어지다 → 노래지다’가 된다. 그러면 ‘허옇다’는 어떻게 바뀔까. 이 활용은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면 의외로 표기를 틀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꺼멓+어지다 → 꺼메지다’로 된다. ‘허옇다’ 역시 ‘허옇+어지다 → 허예지다’로, ‘하얗다’는 ‘하얘지다’로 적는다. 이런 표기의 차이는 복잡한 것 같지만 기본 원리만 알고 있으면 그리 헷갈리지 않는다. 모음조화 원칙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모음조화는 어간의 끝음절 모음이 양성(‘아, 오’)이냐 음성(그 외 ‘애, 어, 우, 으, 이’ 따위)이냐에 따라 뒤에 붙는 어미도 양성(아)이나 음성(어)을 일치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를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표기의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까맣다’의 활용꼴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지난여름 (까?던/까마던/까?던/까맣던/까맸던) 얼굴이 요즘 뽀얘졌다.’ 이 문장에서 맞는 표기는 ‘까맣던’과 ‘까맸던’이다. 우선 ‘까맣던’은 ‘까맣다’에 회상시제 ‘-던’이 붙은 말이다. ‘까맸던’은 바로 위에서 살펴본 ‘까맣+았던 → 까맸던’의 과정을 거친 말이다. 나머지는 모두 ‘ㅎ’ 불규칙 활용 원칙에서 벗어나는, 틀린 말이다.
‘떼어 놓은 당상’의 ‘놓은’은 규칙동사
‘ㅎ’ 불규칙이 유난히 까다로운 이유는 형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경우가 있어서이다.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떼어 놓은 당상’이란 속담이 있다. 일이 확실해 조금도 틀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따 놓은 당상’이라고 해도 같은 말이다. 원래는 ‘떼어 놓은 당상’인데, 사람들이 워낙 ‘따 놓은~’ 식으로 많이 써서 이 말도 허용했다. ‘떼어 놓은 당상’은 임금이 따로 떼어 놓았을 정도로 확실한 자리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문제는 이 말을 ‘떼어 논 당상’이든 ‘따 논 당상’이든 ‘놓은’이 와야 할 자리에 ‘논’을 쓰는 경우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틀린 표기다. 이는 기본형 ‘놓다’가 지금까지 살핀 ㅎ불규칙 형용사와 형태가 비슷해서, 또는 사람들이 발음을 자칫 ‘떼어 논~’ 식으로 하기 십상이라 그 관형꼴을 ‘논’으로 착각한 데서 연유한 오류다. ‘놓다’를 비롯해 ‘닿다/빻다/찧다/낳다/넣다' 등은 모두 규칙동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활용할 때 ‘놓고/놓으니/놓으면/놓지/놓아/놓은’ 식으로 받침 ‘ㅎ’이 탈락하지 않는다. 대개는 이들을 잘못 쓰는 경우가 없지만 유독 관형형인 ‘놓은’을 쓸 때 이를 줄여 ‘논’으로 적기 십상이라 문제가 된다.
이것이 틀린 것은 같은 계열인 ‘닿다/빻다/찧다’와 형용사 ‘좋다’ 등의 말이 그 관형형을 ‘단/빤/찐/존’ 식으로 쓰지 않는다는 데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항상 ‘닿은/빻은/찧은/좋은’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관형형이 ‘논’으로 되는 말은 따로 있다. 바로 동사 ‘놀다’이다. 즉 ‘실컷 논 뒤에...’ 식으로 쓰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놀다’의 관형형이 ‘논’으로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사 ‘졸다/달다/빨다/찌다’의 관형형이 각각 ‘존/단/빤/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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