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52주년 특별기획
자본시장의 울트라갑(甲) 연기금
[ 좌동욱 기자 ] 국내 유력 사모펀드(PEF) 운용사의 A상무는 몇 년 전 대형 연기금의 위탁 운용사 선정 모집에 지원했다가 고역을 치른 경험을 잊지 못한다. 모집 공고 전 인사를 겸해 일찌감치 사무실을 찾았더니 대뜸 골프 약속부터 잡자고 했다. 가장 빠른 날로 날짜를 잡았다. 약속 당일 아침식사부터 골프, 오찬을 겸한 술자리, 단란주점까지 하루종일 ‘갑님’을 모셨다. 그런데 웬걸. 위탁 운용사 선정에서 보기 좋게 탈락했다. A씨는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수익을 내기 위해 ‘분초’를 다투는 자본시장에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촘촘한 ‘갑을관계’로 얽혀 있다. 대표적인 ‘갑을관계’가 자금을 위탁하는 기관투자가(LP)와 위탁 자금을 운용하는 운용사(GP) 관계다. GP로선 LP 돈을 많이, 그것도 장기로 끌어들일수록 이익이다. 반대로 돈을 모으지 못하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말짱 ‘꽝’이다. LP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PEF는 물론 부동산, 주식, 채권 등 특성과 만기가 제각각인 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내는 다양한 운용사들은 기관투자가에 철저히 을이 된다. 이들에게 자금을 맡기는 국민연금공단, 우정사업본부, 각종 공제회, 보험사 등 기관투자가들은 ‘자본시장의 슈퍼갑’으로 행세한다.
이들의 운용 규모가 수백억원, 수천억원에 이르다 보니 을의 접대 규모와 방식도 상상을 초월한다. 운용사 대표 직함을 가지면 웬만한 호텔 일식당과 중식당의 VIP 고객이 된다. ‘갑님’ 접대를 위해 자주 찾기 때문이다. 한 부동산 운용사 대표는 “명절이 되면 VIP 고객이라는 이유로 고급 한식집에서 선물을 보내더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재미있는 것은 자본시장 ‘갑을의 지위’는 고정되지 않고 ‘돈의 논리’에 따라 변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글로벌 저금리와 저성장으로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면서 투자자들이 과거처럼 쉽게 수익을 내기가 어려워지자 실력 있는 운용사들이 ‘갑’의 지위로 올라서고 있다. 매년 1조원 안팎을 PEF에 출자하는 산업은행은 올 들어 국내 유력 운용사들에 순차적으로 밥을 사면서 시장 정보를 ‘귀동냥’하고 있다. “갑질하고 다닌다는 사내 루머도 없애고 좋은 운용사도 뽑을 수 있다”(성시호 산업은행 간접투자금융실장)는 설명이다.
갑을관계가 역전되는 경우도 있다. 운용사는 기관투자가엔 을이지만 법무, 회계, 세무법인, 투자은행(IB)엔 ‘울트라갑’이다. 자산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이들 전문가 집단에 일감을 주기 때문이다. 전문 지식을 주고받는 서비스 영역인 탓에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법무법인 대표는 “같은 오피스 빌딩에 입주한 부동산 운용사 임직원들에게 수시로 불려가 개인 법률 상담까지 해준다”며 “돈을 주기는커녕 미안한 생각도 하지 않더라”고 말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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