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봄비 끝으로 때아닌 돌풍이 몰아닥쳤다. 4월에 보기 드문 돌개바람이다. 그 강한 회오리에 꽃잎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앙증맞은 입을 벌리며 막 벙그는 라일락꽃도 이리저리 흩어진다. 꽃 진 자리마다 진하게 묻어나는 향기가 애잔하다.
라일락은 풍성한 꽃무리와 함께 뛰어난 향기로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끄는 관상수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긴 깔때기 모양의 꽃이 네 갈래로 벌어지고, 원뿔모양의 꽃차례에 수십 송이씩 함께 피니 더 풍요롭다. 홑꽃과 겹꽃, 8겹까지도 핀다. 품종에 따라 흰색·연보라색·붉은 보라색 꽃이 피는데 가장 많은 게 보라색 계통이다.
영어 이름 라일락(lilac)은 푸르스름하다는 뜻의 아라비아어에서 왔다. 프랑스어로는 릴라(lilas)라고 한다. 60년대를 풍미한 가요 ‘베사메무초’의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라는 그 리라가 바로 라일락이다. ‘나에게 듬뿍 키스해 주세요’라는 노랫말처럼 라일락 향기는 첫사랑의 키스만큼 달콤하고 감미롭다.
라일락은 시인 T S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 /언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라 했듯이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도 북부 지방의 석회암 지대에 많이 산다. 성질이 까다롭지 않아 어디에 옮겨심어도 잘 자란다. 수수꽃을 많이 닮았다 해서 우리말 이름으로는 ‘수수꽃다리’로 불린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우리 자생종 이름만 그렇고, 유럽 원산인 라일락은 ‘서양수수꽃다리’로 구분한다.
라일락은 수수꽃다리보다 키가 좀 더 크고 꽃과 잎은 작다. 꽃 색깔은 수수꽃다리보다 자색이 진하다. 향도 수수꽃다리가 은은한 데 비해 라일락은 강하다. 가장 큰 차이는 새순이 나는 자리다. 라일락은 뿌리 부분에서 맹아가 많이 돋고, 수수꽃다리는 뿌리에서 싹이 나지 않는다. 유전적으로 비슷하긴 해도 순우리꽃 수수꽃다리와 수입품종 라일락은 각기 다른 나무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를 완전하게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라일락은 식물자원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도 꼭 등장한다. 1947년 미군정청 직원이 북한산에서 얻은 수수꽃다리 종자를 미국으로 가져간 뒤 보라색 꽃으로 개량하고 특허를 낸 ‘미스김 라일락’ 얘기다. 함께 일하던 여직원의 성을 따 이름지었다는 이 꽃은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걸 우리가 로열티를 주고 역수입하고 있으니 안타깝긴 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라일락 꽃잎 따라 봄날의 상념도 이리저리 흩어진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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