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는 관리직으로 승진하면서 실무에서 손을 떼고, 일부는 영업직으로 노선을 바꾸고, 일부는 게임회사를 떠나 창업을 시도한다. 실제로 게임회사에서 40대 이상의 현역 개발자를 만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엔드림 김태곤 상무는 조금 특별한 케이스에 속한다. 소위 '대한민국 1세대 개발자' 출신 중 몇 남지 않은 현역 개발자다. 개발 경력만 따져봐도, 1993년 '나이트마스터'를 기점으로 햇수가 20년을 훌쩍 넘어간다. TV 개그프로그램 속 달인의 기준이 16년이니, 그는 게임개발의 달인을 넘어서 초인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초인' 개발자로서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다. "아무도 맡긴 적은 없지만…"이라고 웃으면서도 개발자의 꿈을 좇는 후배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는 게 그의 목표다. 가능한 오래 현역으로 일하면서 '게임 개발자도 저 나이까지 활동할 수 있구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60살 환갑이 되어서도 현역 개발자로 활동한다면 개발자의 수명이 매우 길다는 것을 누구나 믿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얼마 전 십수 년간 몸담았던 엔도어즈를 떠났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새 모바일게임 개발사를 창업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혹자는 그가 드디어 최종 테크트리를 탄다고 수군거렸다. 개발전선에서 은퇴하고 경영자로서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재충전 기간은 의외로 짧았다. 그는 한달 남짓 후인 지난 10월, 신생개발사 엔드림의 창업자로 컴백했다. 그런데 대표가 아닌 개발본부장이다. 개발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그의 고집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사업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라면서 "전문경영자가 대표를 맡고, 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엔드림의 대표는 조성원 조이시티 대표가 겸임한다.
김태곤 상무와의 인터뷰 스케줄은 생각보다 쉽게 잡히지 않았다. 회사 설립 초기인만큼 그가 신경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달을 넘겨 11월이 되어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아직 새것 느낌이 채 가시지 않은 엔드림 사무실에서, 엔드림 개발본부장으로서의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p>
너무 갑작스러운 사직과 너무 빠른 컴백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정황상 넥슨 및 엔도어즈와의 불화를 의심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상무는 "절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꿈을 펼치고 싶었다는 것이다. 넥슨과는 갈등이 전혀 없었다며, 그 증거로 엔드림이 입주한 이 사무실도 엔도어즈 소유의 부동산이라고 설명했다.
그에게 있어 넥슨은 여전한 아군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넥슨과 새로운 게임을 공동개발하고 싶은 소망도 있다. 또한 전 직장에 남기고 온 자식과도 같은 IP들을 활용해 모바일게임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그러나 협의가 필요한 일이니만큼 당장 어떻게 하기보다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고민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사실 그는 넥슨과 엔도어즈뿐만이 아니라 게임업계 전체를 아군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장의 파이를 뺏거나 빼앗기는 적이 아니라 같이 성장해야 하는 파트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쫓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욕을 먹으면서 무언가를 취하는 기업은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조성원 대표와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는 "조 대표와 함께 창업해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덕이 좋기 때문"이라며 "조 대표의 사고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렇게 마음이 맞으니 신뢰도도 높을 수밖에 없다. 개발하는 입장에서는 사업쪽에서 마케팅하기 편한 요소를 넣으려고 고민하고, 사업하는 입장에서는 개발자들이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했다. 현대판 형님먼저 아우먼저가 따로 없다.
그는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것이 매우 즐겁다고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책을 다시 꺼내서 읽는 기분'이다. 가구는 어떤 것으로 들여놓아야 할지, 인테리어의 색깔은 어떻게 할지, 파티션 구성은 어떻게 해야 할지 등,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곤할 수 있는 일들이 그에게는 다르게 느껴진다. 틀을 차근차근 다시 짜는 과정이 퍽 재미있나보다.
김태곤 사단, 베테랑들만 모인 신생회사
설립된지 한달을 갓 넘긴 엔드림에게는 신생회사에 으레 따라오는 '젊은 피', '패기넘치는' 등과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20명 조금 넘는 인원들 모두가 게임업계에 오래 몸담았던 베테랑들이다. 김태곤 상무와 최소한 한두 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함께 해 본 사람들만 모였다. 이 정도면 '김태곤 사단'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 상무는 "그렇다고 해서 참신함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합류한 사람들 중에는 창업 경험이 있는 사람을 포함해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며 "다양한 문화가 융합해서 익숙함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회사가 됐다"고 말했다.
환갑 개발자를 목표로 하는 김 상무의 직업관은 다른 임직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직원들 모두가 다른 회사에서의 관리자급에 속하는 경력을 가졌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것 없다"며 "모니터를 바라볼 힘이 남아있을 나이까지 개발자로 활동하려면 관리자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현역 개발자라는 아이덴티티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야 도태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베테랑들만 모였으니 당장 게임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도 이상하지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김 상무는 좀처럼 첫 게임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시장 판도가 변한 만큼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엔드림의 첫 게임은 과연 어떤 게임이 될까.
그는 "한국시장과 해외시장의 교집합을 찾다보니까 고민이 깊어진다"며 "모바일게임을 중심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기조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게임을 만들지는 정해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 영화배우들이 매 작품마다 새로운 연기를 시도하는 것처럼, 엔드림도 역사물만 고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이제까지 쌓아온 필모그래피가 역사물 위주인만큼, 어떤 게임을 만들어도 기존의 스타일이 어느 정도는 묻어나올 수는 있다고 귀띔했다. 첫 게임의 출시 시기는 내년 하반기로 잡고 있다.
그는 "지금은 개발자든 마케터든 시장의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몇 년동안 골방에 처박혀서 자기 고집대로 게임을 만들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 그는 "개발자가 왕이던 시절은 죽었다"며 마케터들이 시장 이해를 바탕으로 가이드를 먼저 제시해주고, 개발자들이 그것을 받아서 게임으로 구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지금은 자동전투 액션RPG가 시장의 중심을 이끌고 있지만, 과연 6개월 뒤에는 어떤 게임이 트렌드가 될 것인가. 그것이 현재 그의 최고 관심사다.</p>
혹자는 김 상무를 '한국의 시드마이어'라고 일컫는다. 역사 게임을 주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진록', '거상', '군주온라인', '아틀란티카', '삼국지를품다', '광개토태왕' 등 그가 개발해서 성공한 수많은 게임들이 역사를 소재로 하거나 역사물 DNA를 품고 있다. 역사물을 만드는 게 즐겁고, 역사를 제대로 다루고 싶은 욕심이 많은 그다.
그런데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좀 의외다. 판타지풍의 모바일RPG '영웅의군단'이란다. 이유를 물어보니 개발 과정의 어려움에 비해 게임 완성도가 생각보다 잘 나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우여곡절이 많은 게임"이라며 "PC로 개발하다가 모바일로 어렵게 방향을 틀었는데, 당시 모바일게임 개발 경험 부족 등의 불안요소가 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현재도 20위권 순위 안에 카카오게임하기 버전과 구글 버전 2가지가 모두 올라가 있다"며 "오랜 기간 선전하고 있어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반면 아쉬웠던 게임은 '광개토태왕'이다. 모처럼 초심으로 돌아간 전략게임으로, 자동전투 중심의 RPG에 대한 반발심으로 수동전투를 중심으로 플레이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모바일 플랫폼에 최적화했다는 점은 만족스럽다고 자평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유저들이 몰리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모바일유저들의 플레이패턴이 매우 라이트하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며 "(광개토태왕의 시행착오가) 이번에 개발할 게임의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엔도어즈를 떠나서 엔드림을 설립하기까지의 휴식기 동안 다른 게임개발사들이 만든 게임을 미치도록 즐겼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는 다른 개발사의 게임을 하기보다 우리 게임을 파고드는데 집중했다"며 "다른 개발사 게임을 하더라도 배울 것을 찾고 참고할 점을 찾다보니 재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게임이라는게 공부하기보다는 즐겨야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 지금은 그 때의 교훈을 발판삼아 "균형감을 찾으려고 노력중"이라고 덧붙였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라
김 상무는 새로운 게임에 대한 영감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는다. 물론 과거부터 쭉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게임에 대한 욕심이 큰 줄기가 되지만, 다른 게임을 하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얻은 영감을 통해 개발 궤도를 끊임없이 수정한다. 그는 "나는 선지자가 아니다"라며 "과거에는 개발실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고 말했다.
끝으로 후배개발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조언을 물어봤다. 그러자 준비했다는듯이 답변이 나왔다.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또래집단과 개발자들끼리의 폐쇄적인 네트워크만 중요하게 여기면 큰 꿈을 펼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혼자 다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그 경쟁력이 손상되지 않는 구조 내에서 일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결국 프로그래밍부터 비즈니스까지 믿고 맡길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놓아야 하는 이유죠."</p>
서동민 한경닷컴 게임톡 기자 cromdand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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