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우위' 電·車·유통 한국 기업, 안주하면 샌드위치
제로베이스서 현지화, 기술·플랫폼·마케팅 혁신해야
한국 기업들이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도 이겨냈던 한국 기업들이 말이다. 한국 기업들은 선진국의 부진에도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 시장에서 선전하며 성장해왔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경기 부진과 현지 기업들의 성장으로 더욱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텃밭이었던 신흥국 시장에서도 점차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경닷컴이 창간 16주년을 맞아 한국 기업들이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봤다. [편집자 주]
[ 김봉구 기자 ] ‘넥스트 차이나’. 해외 시장 문을 두드리는 K-기업의 화두다.
올 들어 전자·자동차·유통 등 한국 기업 대표주자들이 중국 대륙에서 고배를 들었다. 삼성·LG전자를 위협하는 샤오미의 약진이 대표적이다. 현대·기아자동차는 현지 판매 대수가 10% 가량 떨어졌다. 토종 업체의 저가 공세 탓이다. 이마트는 상반기에만 260억원 가량의 적자를 냈다. 중국 내 점포를 늘려오던 롯데마트도 최근 산둥성 내 점포 5곳의 문을 닫았다.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선 중국 시장 공략이 만만찮아졌다. 현지(로컬) 기업 급성장의 여파다.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는 데다 품질 격차까지 줄어들고 있다. 세계무대에서도 중국 기업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유사한 수출구조를 가진 한중 양국의 경쟁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중국의 기술력 강화, 해외진출 확대 정책이 불을 댕겼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이런 내용의 ‘중국경제 변화와 중소기업의 대응과제’ 보고서를 발표했다. 대중(對中) 의존도 축소와 신흥시장(이머징 마켓) 진출의 필요성이 골자다. 보고서 제목의 중소기업을 한국 기업으로 바꿔도 제시된 전략은 유효하다.
1~3회에서 분야별 현황과 전망을 살펴본 데 이어 마지막 회에선 K-기업 위기탈출 방안을 물었다. 전문가들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인도, 중동 등을 ‘타깃팅 신흥시장’으로 꼽았다. 프로젝트명 넥스트 차이나, 액션플랜 핵심 키워드는 로컬·연구개발(R&D)·혁신이다.
◆ 이대로 가면 샌드위치
모두 신흥국 후발주자에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란 점에서 뼈아픈 성적표다. 김주권 건국대 경영대학 교수는 “삼성·LG전자가 있는 전자제품군, 현대·기아차의 수송기계, 이마트·롯데마트로 대표되는 유통업 3가지가 우리 기업이 경쟁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다. 문제는 신흥국 기업과의 경쟁력 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현 추세대로라면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샤오미 같은 중저가 모델이 치고 올라온다. 삼성전자 수요를 잡아먹는 구조다. 현대차 상황도 유사하다. 초유의 ‘디젤게이트’ 폭스바겐 사태 반사이익은 미미했고 로컬 업체의 추격은 거셌다. 반면 라이벌로 설정한 애플, 도요타 등 글로벌 업체는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한 마디로 강력한 전·후방 압박을 받는 상황이다.
해법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맞춤형 현지화(로컬라이제이션) △생산에서 연구·개발(R&D)로의 무게중심 이동 △차별화된 기술·플랫폼·마케팅 혁신이 그것이다. 뼛속까지 현지화에 성공한 글로벌 다국적 기업 사례, 글로벌 밸류체인(가치사슬: 기업 활동에서 부가가치의 생성 과정) 분석, 블루오션 발굴·개척 가능성을 각각의 근거로 제시했다.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은 수평적 진보를 글로벌화로, 수직적 진보를 기술로 정의했다. 그의 분석틀에 따라 좌표화하면 현지화는 수평적 공략법, R&D는 수직적 공략법이 된다. 전자는 제2, 제3의 신흥시장을 찾아나서는 공간 확장 개념이다. 후자는 포화시장도 뚫어내는 혁신기술의 양태를 띤다. 여기에 플랫폼·마케팅 관점의 접근법이 가미된다. 좌표상 가로축과 세로축을 잇는 매개체 역할을 맡는다.
틸은 기술이 글로벌화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다만 기업 경영전략 차원에선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시장 개척과 선진국에도 통하는 기술 혁신 노력을 병행하라”고 주문했다. O2O(Online to Offline)·B2B(Business to Business) 등의 플랫폼 개발, 한류 마케팅 접목도 제안했다.
◆ 궁극의 글로벌은 로컬
글로벌화 승부수는 역설적으로 ‘현지화’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큰 밑그림일 뿐, 실제 사례에서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현지 특수성이 진출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최종적 요인이란 것이다. 수출 위주 사고의 탈피가 대전제다.
박종훈 서강대 경영대 교수(한국전략경영학회장)는 “본국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전통적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국내 기업 중 해외 진출을 선도하는 현대차도 2000년대 중반 들어서야 현지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며 “보다 적극적인 해외 전략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남석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도 “효과를 정확히 예측해 해외직접투자로 현지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 기업의 현지화 정도는 판매·생산법인 이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몇 단계 더 끌어올려야 한다. 박 교수는 “R&D 기능을 이전하고 현지 인력을 채용해 ‘분권화’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가 지역전문가를 키워 파견하지만 한국 방식을 이식하는 것이다. 앞서가는 다국적 기업은 지역본부를 두고 현지 육성 개념으로 접근한다”고도 했다.
현지화는 커스터마이징(맞춤형 서비스)과 동의어다. 본국 색깔을 지우고 현지에 뿌리내리는 노력이 핵심이다. 안승호 숭실대 경영대학원장(한국유통학회장)은 “본국 매뉴얼에 대한 과신을 경계해야 한다. 현지 정서나 문화와 맞지 않아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영국 테스코의 성공요인 중 하나는 현지화에 충실하다는 점”이라고 부연했다.
결국 현지 소비자의 니즈(요구)를 면밀히 파악해 걸맞은 상품구조를 갖추는 게 관건이다. 전달영 충북대 경영학부 교수는 “동남아는 중저가 위주란 편견이 있다. 그러나 실제 사례 분석을 해보면 저가 시장은 로컬 기업이 강세”라며 “우리 유통기업은 프리미엄 PB(자체브랜드) 위주로 고급화 전략을 가져가야 차별화·현지화에 성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이기는 싸움에 임하라
넥스트 차이나 못지않게 ‘비욘드 차이나’ 전략도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R&D와 기술 혁신의 중요성을 되풀이 역설했다.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선진국 시장에서도 통하는 기업이 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뚜렷한 근거가 있다. 글로벌 밸류체인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생산의 부가가치는 떨어지고 R&D 부가가치가 올라가는 추세다.
단적인 사례가 애플과 삼성전자다. 김주권 건국대 교수는 “애플은 R&D와 유통에, 삼성전자는 생산에 강점이 있다. 불리한 싸움이다. 밸류체인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쪽으로 체질 개선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해오던 분야만 파선 승산이 없다. 구조적으로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강점을 십분 발휘해야 한다. 반도체칩 설계분야 권위자인 유회준 KAIST(한국과학기술원)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소프트웨어에 올인하고 있는데 사실 우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은 반도체칩이다. 스마트폰으로 치면 카메라, 디스플레이 쪽을 차별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교수는 “전투에 비유해보자. 칼을 잘 쓰는데 왜 육박전을 고집하느냐”고 반문했다.
문형남 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 교수는 5G 기술 전력투구를 주장했다. 그는 “사물인터넷(IoT)을 비롯한 빅데이터, 클라우드 기술의 핵심 인프라가 될 5G 환경을 우리가 선점해야 한다. 특히 한일간 경쟁에서 앞서나가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원천기술 개발과 국제 표준에서 선제적 전략을 펴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논리다.
단 방향 설정이 잘못된 해외 시장 과속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폭스바겐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보통신(IT) 강국이라면서 정작 우리 차산업은 가솔린 엔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이브리드 시장에도 제대로 대응 못했는데 10~20년 후 전기차 시대에 또 헤맬 것이냐”면서 “미래 먹거리 차원에서 R&D에 적극 투자하고 정부도 밀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 새판짜기 해야 통한다
다음 단계는 새 판 짜기다. 플랫폼 다변화, 세분화된 맞춤형 마케팅 전략은 고객과의 접촉면을 넓힐 수 있다. 인식 전환을 통해 포화시장을 블루오션으로 바꾸라는 조언이 뒤따랐다.
“이미 모든 사람이 핸드폰을 쓰고 있다면 한 사람이 두 개를 사용하도록 방법을 찾자.” 인호 고려대 컴퓨터학과 교수의 제안이다. 그는 “앞으로 핸드폰이 하드웨어적 차별성을 갖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삼성페이 같은 기능을 결합하거나 보안을 강화하는 식으로 다양한 요구에 맞춰 서비스를 완전히 특화해야 시장 개척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 교수는 유튜브의 B2B 버전인 우알라(Ooyala)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B2C가 꽉 찼다면 B2B 영역에 눈길을 돌려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세대별 타깃팅도 필요하다. 정연승 단국대 교수는 “선진국과 신흥시장의 이분법적 구도를 탈피해야 한다. 한 국가 내에서도 세대별 코드에 따라 마케팅할 여지가 충분하다”며 “해외 젊은층의 관심이 높은 한류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자”고 말했다.
‘원 마켓 멀티 니즈’에 착안한 디테일이 중요하다. 이랜드그룹의 중국 진출 사례를 분석한 논문 ‘신흥국 글로벌 기업의 신흥시장 현지화에 관한 소고’(김장훈, ‘전문경영인연구’ 15권 3호)는 “중저가에서 대중적 명품을 아우르는 멀티브랜드 전략으로 현지의 다양한 니즈를 충족시켰다”고 평가했다.
이두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시장과 고객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 시장만 해도 수백만원짜리 고급 핸드폰과 아주 저렴한 보급형 핸드폰의 수요가 공존한다”면서 “현지 문화와 시장 지형을 세밀하게 파악한 마케팅이 요구된다. 수요가 다변화됐다면 제품 사양도 차별화하고, 제품 설계부터 해당 국가에 적합하게 변형해야 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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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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