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미 기자의 경제 블랙박스
[ 김유미 기자 ] 매월 둘째주 금요일자 신문을 펼쳐들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늘 같은 구도다. 의장석에 앉은 이 총재가 한손으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하루 전 한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전체회의 사진이다.
이 총재의 근엄한 표정을 보면 금통위에서 방금 전 중대한 결정을 내린 듯하다. 사실 그는 회의 시작을 알리는 의사봉을 두드렸을 뿐이다. 사진 촬영 직후 기자들은 회의실 바깥으로 물러난다. 문이 닫힌 뒤에야 금통위원들의 비공개 논의가 시작된다.
지난 15일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연 1.75%로 동결했다. 결정 직후 이 총재가 의사봉을 어떤 표정으로 두드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2주 뒤 화요일 오후 4시에 한은 홈페이지에 공개되는 ‘금통위 의사록’을 읽어보면 된다.
의사록을 보면 금통위가 어떤 이유로 금리를 동결했는지 알 수 있다. 금리 인하 주장이 치열했던 것으로 나타나면 시장에선 향후 인하 가능성에 좀 더 주목할 것이다.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은 글로벌 금융시장에 나침반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지난 4월 금통위 의사록(2015년 제7회 정기회의)은 A4용지 36쪽 분량이다. 지난 1월 50쪽에 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얇다. 본문은 12포인트 크기의 중고딕체 하나로만 이뤄져 있다. ‘공무원 느낌이 난다’는 정부 부처들의 문서도 금통위 의사록과 비교하면 화려한 편이다. 내용 자체가 중요한 의사록의 성격상 불가피할지 모른다.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동(同)위원은’(31회)과 ‘일부 위원은’(29회)이다. 속기록과 달리 의사록은 발언자가 익명이다. 이 말을 한 위원이 7명 가운데 누구인지 유추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한은 관계자들은 “자꾸 보면 누군지 훤하다”고 한다(용기를 내 “누구인 것 같으냐”고 물으면 안 알려준다).
의사록 분량은 갈수록 두꺼워졌다. 매월 금리결정 정기회의의 의사록 분량을 집계해보니 2011년엔 평균 23.6장이었다. 매년 급증하더니 작년엔 평균 45장으로 거의 두 배가 됐다. 금통위원이 상근하기 시작한 1998년엔 10장 안팎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박철원 한은 의사팀장은 “금통위원의 전문성이 높아지면서 논의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성근 정해방 정순원 문우식 위원은 2012년 4월21일 함께 취임했다. 3년 넘게 금통위원으로 활동한 만큼 고민의 깊이 역시 과거와 비교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의사록을 보면 해외 논문을 인용하거나 세밀한 통계 분석을 내놓는 위원이 적지 않다.
지난해 합류한 함준호 위원도 통화정책 전문가다. 과거 금통위원들은 의안을 통과시키고 밥만 먹고 간다며 ‘식객’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7년 한은법 개정 뒤 의사록을 공개하면서 이들의 책임성이 커졌다.
아쉬운 점도 있다. 50쪽가량을 읽고 나면 내용을 정리하기 쉽지 않다. 한은 홈페이지의 의사록 조회수는 예년보다 늘었지만 1000회를 넘기진 못한다. 의사록 공개의 또 다른 취지로는 ‘시장과의 소통’이 꼽힌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의사록에 대해 “현학적인 이야기가 많고 장황하다”고 말했다.
한은도 고심하고 있다. 현 금통위 의사록은 개별 의견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장황해지기 쉽다. 일부에선 공통의견을 중심으로 재배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미국 영국 일본 등에서 채택한 방식이다. 주제별로 ‘어떤 의견이 다수였고 어떤 소수 의견도 있었다’고 정리해주는 것이다. 다만 서술 방식을 바꾸면 발언 순서에 손을 대야 하므로 정리자 입장에선 일이 늘어난다.
비슷한 고민은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투명성과 소통에 대한 요구가 전세계적으로 커지고 있어서다. 중앙은행의 ‘사소한 변화’가 눈길을 끄는 이유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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