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하 기자 ] # 3월의 어느 금요일 아침 9시. 서울 삼성동의 빼곡한 빌딩 숲 사이에 있는 OO산업. 회사 내 행사장 문 앞에는 수십여명의 사람들이 몰려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긴장한 어깨 사이로 고성들이 오고 간다. "내가 이 회사 주주야. 신분증이 내 거 맞다니까 왜 못 들어가게 막는 거야"
주식회사는 주식을 가진 주주들에 의해 경영의사를 결정하는 회사다. 정기 주주총회는 주주들이 모여서 회사의 지난 1년을 결산하고, 다가올 1년을 결정하는 자리다. 그러나 여전히 주주의 권리를 무시한 채 대주주나 회사 측이 원하는 대로 진행하는 주총은 아직도 남아 있다.
주주명부 열람을 거부·지연하거나 주총이 열리는 시간·장소를 물리적으로 접근하게 어렵게 만드는 방법 등으로 주주의 권리를 제한한다.
전문가들은 주총에서 소액주주를 배제하는 비민주적인 의사 진행이나 고성과 몸싸움이 뒤섞인 '막장 주총', 사전에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는 '3류 주총'은 당장 고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알맹이 없는 주총 언제까지…물리적·시간적 '제약'으로 주주 권리 '제한'
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한날한시'에 주총이 열리는 이른바 '슈퍼 주총데이' 현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실제로 지난달 27일에는 12월 결산법인 중 45% 수준에 달하는 810개사의 주총이 한꺼번에 열렸다. 사상 최대 규모다.
같은 날 주총이 열리면 소액주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 여러 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어도 물리적 제약 탓에 주주권 행사가 어려워진다.
소액주주들은 개개인의 지분율은 미미하지만, 모이면 최대주주를 능가하는 의결권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회사의 최대주주나 경영진 측 등은 온갖 직·간접적인 편법들을 동원한다.
소액주주들이 의결권을 모으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누가 주주인지부터 파악하는 '주주명부 열람'이다. 그러나 명부를 확인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주주명부에 대한 열람을 거부하거나 시간을 끄는 것은 경영권 다툼이나 표대결이 예상되는 경우 회사 측이 가장 손쉽게 쓰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경우 법원의 명령이 내려진 뒤에야 주주명부를 공개한다.
기업지배구조 컨설팅업체인 네비스탁의 엄상열 팀장은 "주주총회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누가 주주인지를 확정하는 주주명부를 작성해야 하는데 이는 회사 측이 주도하기 때문에 외부 주주들은 정보 접근에 제한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주총 전까지 제한된 시간을 이용해 우회적으로 소액주주들의 권리행사를 막고 있는 셈이다.
엄 팀장은 "주주명부 열람을 위해 최종적으로 법원 명령을 받아 확인하게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이미 상단한 시간을 소요, 다른 주주들의 의결권을 모으는 게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주총장 '장소' 자체가 주주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편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주주가 찾아오기 어렵게 만들거나 주총장 출입을 까다롭게 제한하는 것이다.
지난 2011년 상장폐지된 스톰이앤에프는 당시 주총 일정을 공시는 했지만, 실제 주총장소에는 어떤 안내문도 붙이지 않고 행사장 문도 닫아놓았다.
신일산업은 지난달 30일 오전 10시 주총을 열었으나 3시간이 다 되도록 출석 주주 현황 보고도 하지 못했다. 사측의 주주명부 확인이 지연된 데다가 위임장 철회 및 위조 사례 등이 발견되면서 개회와 정회를 반복하기도 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주총장을 직원이나 동원 인력으로 채워서 정작 진짜 주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경우나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의사 진행을 해 진짜 주주들의 발언권을 제한하는 일도 너무 흔하다"며 "심지어 특정 주주들의 의결권을 무효화 하는 경우들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말했다.
주총 투표방법에도 형식적 제한이 없기 때문에 대주주나 회사 측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한다.
현장 분위기를 유리하게 이끌면서 거수나 박수를 통해 표결을 마치거나 투표용지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기표 방식 등을 꼬투리 잡아 '무효표'를 만드는 것이다. 인수합병(M&A) 시도가 있을 때는 법적 분쟁에 걸려있는 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거나 위임장을 무효화 하기도 한다.
◆2012년 시행된 주총 검사인 제도…적법성만 따질 뿐, 주총 파행은 못 막아
만약 주주들간의 첨예한 갈등이 예상되는 주총의 경우 '제3의 목격자'를 두기도 한다. 주총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성립됐다는 입증하거나 그 반대를 입증하기 위해 2012년부터 법원에 '주총 검사인'을 요청할 수 있다.
법원에서 파견된 검사인은 소액주주들의 요청으로 2013년 3월 휴스틸 주총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같은해 12월 홈캐스트 주총에도 검사인이 나왔지만, 결과는 모두 대주주 측의 안건이 통과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박지훈 변호사는 "검사인은 총회 진행 과정에서 법률적 하자 여부를 '기록'하고, 주총 후에 생길 수 있는 법적 분쟁에 대비한 객관적 증거들을 법원에 보고하는 역할을 한다"며 "다만 법원에서 파견된 검사인은 주총 진행에 어떤 관여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주총이 파행을 겪더라도 검사인은 '객관적 중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기록만 할 뿐이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는 "주총은 회사와 주주가 소통할 수 있는 자리이자 회사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다"며 "당장 번거롭거 시끄럽다고 외면한다면 기업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쌓일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주총을 '소통의 장'으로 활용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워런 버핏이 이끄는 미국의 버크셔 해서웨이다. 이 회사의 주총에는 3만여명의 주주가 참석하고 워런 버핏 등 경영진은 주주들의 다양한 질문에 몇 시간에 걸쳐 대답한다.
올해 국내 주총에서도 분쟁을 겪었지만 잘 마무리된 경우도 있었다. 부산주공의 경우 주주제안을 통해 상정된 이사 선임안에 대해 주총장에서 대주주 측과 소액주주들간의 토론이 실제 진행됐다. 반대입장을 보였던 대주주 측도 찬성표로 돌아섰다.
엄 팀장은 "부산주공은 회사 지배구조에 대한 주주들의 불신이 커서 첨예한 대결이 예상됐었다"며 "실제 주총 토론 과정에서 회사 측도 주주들이 가진 불만을 이해하고 결국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경닷컴 이민하 기자 mina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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