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현철 기자 ] ◆ 특허괴물
애플과 삼성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특허전문관리회사(NPE·특허괴물)들로부터 무더기 특허 소송을 당해 몸살을 앓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30일 발간한 ‘스마트폰 특허 전쟁의 결말과 새로운 위협’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특허 전쟁이 기업과 기업 간 소송전에서 특허전문관리회사와 글로벌 기업 간 소송전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 9월30일 연합뉴스
☞ 잘 알다시피 경제학에 ‘시장실패(market failure)’라는 게 있다. 시장은 한 사회가 가진 자원을 가장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배분하는 기능을 잘 수행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시장의 기능이 원활히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시장의 가격기구가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달성하지 못하는 현상을 시장실패라고 한다.
시장실패의 원인에는 ①무임승차자 문제를 야기하는 공공재의 존재 ②한 기업이나 소수의 기업이 시장가격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독과점 ③한 경제주체의 행위가 아무런 금전적 보상 없이 제3자의 경제적 후생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성(외부효과) ④거래에 참여한 경제주체가 갖고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서로 다른 정보의 비대칭 등이 있다.
특허는 외부성 교정을 위한 법적인 장치
세계가 특허를 비롯한 지식재산권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이유는 이 가운데 외부성과 관계가 깊다. 외부성은 다른 경제주체에 유리한 영향을 미치는 외부경제, 불리한 영향을 미치는 외부불경제로 나눌 수 있다. 외부성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개별 경제주체의 사적인 비용(편익)과 사회적인 비용(편익)이 일치하지만 외부성이 발생하면 사적인 비용(편익)과 사회적인 비용(편익)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공해나 폐수 같은 외부불경제의 경우 사적인 비용이 사회적인 비용보다 적어 사회적 최적 생산량보다 더 많이 생산(과다생산)된다. 반면 사회적으로 필요한 연구·개발(R&D) 투자와 같은 외부경제의 경우 사적인 편익이 사회적인 편익보다 적어 사회적 최적 생산량보다 더 적게 생산(과소생산)된다.
이런 외부성은 정부가 외부불경제엔 세금(예를 들어 환경세)을 부과하고, 외부경제에 대해선 보조금(예를 들어 R&D 보조금)을 지급하면 해결할 수 있다. 외부불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과하는 세금을 피구세라고 한다. 외부경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특허권을 보장해주거나 양봉업자와 과수원처럼 M&A를 유도하는 등의 방법도 있다. 피와 땀을 흘려 세상에 없는 제품이나 발명품을 내놨는데 아무나 그 기술을 활용해 돈을 벌 수 있다면 그 누구도 R&D에 나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허괴물이란?
특허괴물은 이런 법적인 보호장치를 나쁘게 활용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특허괴물(patent troll)’은 개인이나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특허를 사들인 뒤 특허료를 받거나 특허를 침해했다고 판단되는 기업에 소송을 제기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회사를 말한다. 특허관리전문회사(NPE, Non-Practicing Entity)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단어다.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와 같은 조직인 미국의 FTC(Federal Trade Commission)는 특허괴물이 비아냥거리는 뜻을 갖고 있다며 이를 대체하는 PAEs(Patent Assertion Entities)라는 용어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허괴물은 구매하거나 보유한 특허를 제품을 만드는 데가 아니라 소송에 활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사들인 특허와 같거나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는 기업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해 과도한 로열티를 요구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특허괴물로 인해 전 세계 기업이 골치를 썩고 있다. 2004년까지만 해도 특허괴물로부터 소송을 당한 기업은 213개에 그쳤으나 2013년엔 2749개로 급증했다. 미국 특허 조사회사인 페이턴트 프리덤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3년 상반기까지 글로벌 IT 기업이 NPE들에 제소당한 건수는 애플 171건, HP 137건, 삼성 133건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특허괴물들
미국의 인터넷 매체인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2011년 8대 특허괴물을 선정해 발표했다.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인텔렉추얼 벤처스(Intellectual Ventures, IV)다. IV는 세계 IT 기업들에 가장 위협적인 NPE로 알려져 있다. 특허 보유 순위가 2011년 기준으로 세계 5위권이다. 약 4만건의 특허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 출신 소프트웨어 전문가, 특허전문 변호사, 기업전문 변호사가 설립했다. 본사는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근처 워싱턴주 밸뷰에 소재한다.
라운드 록 리서치(Round Rock Research, RRR)는 2009년 특허전문 변호사가 설립했으며 본사는 미국 뉴욕주에 있다. 미국 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으로부터 반도체를 비롯한 정보통신 관련 4200건의 특허를 사들여 NPE 사업을 시작했다.
이 밖에 △애플, EMC, 에릭슨, 마이크로소프트, RIM, 소니로 구성된 록스타(Rockstar) 컨소시엄 △인터디지털(InterDigital) △위스콘신 얼럼니 리서치 파운데이션(Wisconsin Alumni Research Foundation)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를 자주 괴롭히는 램버스(Rambus) △테세라 테크놀로지(Tessera Technologies) △아카시아 리서치(Acacia Research) 등도 주요 특허괴물로 꼽힌다.
특허괴물로 변신한 노키아와 에릭슨
보유 특허를 수입원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은 기존 IT 기업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때 피처폰 시장의 양대 거물이었던 노키아와 에릭슨은 ‘특허괴물’로 변신하고 있다. 핀란드의 노키아는 ‘특허왕국’이다. 미국에서만 1만6000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고, 또 4500건의 특허를 출원 중이다. 미국 특허도 2만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키아는 최근 연간 5억유로(약 6700억원)의 특허 로열티 수입을 올리고 있다. 노키아는 휴대폰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특허 공세를 높이고 있다. 2009년 10월 애플을 특허 침해로 제소, 2년 뒤 6억달러를 배상받았다. 2012년에는 대만 휴대폰 제조사 HTC를 대상으로 특허 침해 소송을 걸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4월 노키아와 특허 라이선싱을 2018년까지 연장하는 계약을 맺은 것도 이 때문이다.
1997년 세계 휴대폰 시장의 40%를 차지한 스웨덴의 에릭슨은 스마트폰 발전 흐름을 쫓아가지 못해 2012년 3월 소니에 팔렸다. 하지만 에릭슨은 무선기술 특허만 3만5000건을 소유한 ‘맹주’다. 최근 들어 에릭슨은 보유 특허를 무기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올 1월 삼성전자는 에릭슨에 6억5000만달러의 로열티를 일시금으로 지급하고, 추가로 약 5억달러의 특허 로열티 지급 라이선싱 계약을 해야 했다. 2012년 11월 에릭슨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벌인 결과였다. 인도의 최대 모바일기기 제조업체인 인텍스와 매트릭스도 지난해부터 에릭슨과 특허 침해 소송을 벌이고 있다.
특허괴물들이 제기하는 소송은 연평균 33%씩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2012년 현재 전체 특허소송의 62%를 특허괴물이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허괴물의 소송 대상 분야도 IT는 물론 자동차, 소매, 보건의료 등 광범위하다. 또 피소 기업의 절반 이상은 매출 1000만달러 이하의 중소기업이다.
반면 기업 간 특허 전쟁은 올 들어 소강 상태다. 구글·삼성의 안드로이드 진영과 애플·마이크로소프트(MS)의 반(反)안드로이드 진영 간의 특허 전쟁은 사실상 종결 국면에 접어들었다. 특허괴물이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면서 IT 기업들이 상호 소송전을 중단하고 서로 협력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구글, SAP, SAS, 레드햇 등 9개 기업은 지난 7월 ‘특허권 교차사용 연합(License on Transfer Network)’을 결성하는 등 공동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특허괴물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국내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나 개인 사용자들도 소송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손상영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인텔렉추얼 벤처스(IV)가 국내 법인을 설립하는 등 특허괴물들이 앱 개발자나 최종 사용자를 상대로 한 소송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허괴물은 자체 R&D는 하지 않고 주로 소송을 통해 돈을 버는 까닭에 지지하기 힘든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평가다.
특히 최종 이용자인 개인도 소송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난받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는 특허괴물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나서고 있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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