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상품화폐(commodity money)의 시대였다. 화폐는 교환을 매개하고 가치를 저장하며 지불 수단과 회계의 단위로서 기능하는 모든 것이다. 크게 상품화폐와 명목화폐(fiat money)로 구분된다. 상품화폐는 물품화폐나 실물화폐라고도 하는데, 재료(소재)의 가치에 기초하여 화폐의 가치가 정해지는 화폐다. 쌀, 무명, 삼베와 같이 일반 재화가 화폐로 사용되는 경우와 금화와 은화, 동전과 같은 금속화폐가 있다.
이러한 상품화폐의 반대편에 있는 화폐가 명목화폐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세종대왕이 그려진 만원짜리 지폐처럼 재료 자체는 아무 쓸모가 없고 국가의 법과 권위와 국민의 믿음에 의해 통용되는 화폐다. 상품화폐와 명목화폐의 양 극단 사이에 신용화폐(fiduciary money, credit money)가 있다. 소재 자체는 명목화폐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지만 액면에 기재된 만큼의 상품화폐나 자산과 교환해준다고 보증한 화폐를 말한다. 금본위제에서 금과 교환해주기로 약속한 태환지폐가 대표적이다.
상평통보 이전에는 쌀· 포목 등 상품화폐 유통
조선왕조는 1401년(태종 1년)에 저화(楮貨)라는 지폐를 발행했으며 세종대에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으나 통용에는 결국 실패하였다. 1678년(숙종 4년)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발행하기까지 화폐로 통용된 것은 일상에서 꼭 필요한 필수품이면서 조세로 거두었던 쌀과 포목(삼베,무명)과 같은 상품화폐였다. 사용을 강제하였다가 보상도 없이 유통을 포기하는 일관성 없는 화폐 정책도 문제였지만, 사람들이 저화와 같은 명목화폐를 “굶주려도 먹을 수 없고 추워도 입을 수 없는 한 조각의 검은 자루에 불과한 것”(『태종실록』 3년)이라고 생각했고, 동전을 주조할 구리의 생산도 부족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울 외에는 상점이 없으므로 비록 화폐가 있다고 해도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신숙주(1417~1475)가 말했던 것처럼 시장경제의 발달이 미약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포목은 잘라서 쓰면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고가의 거래에 사용됐으며, 쌀은 소량으로 분할이 가능하기 때문에 소액 거래에 사용됐다. 기본적으로 기후조건과 민간의 수요·공급에 의해 화폐가치와 통화량이 결정됐기 때문에 재정 운영에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운반에 비용이 많이 들고 부패되기 쉬우며 거래할 때마다 가치를 측정해야 하므로 거래비용도 높았다(거래비용의 의미는 7회 참조).
이 때문에 『경국대전』은 저화와 포화(布貨)를 국가의 공식 화폐로 삼고 품질과 규격을 정해놓았다. 포화는 폭 8촌(37.4㎝), 길이 35척(16.35m)의 5승 품질이었다(1승은 80가닥). 16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아 직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추포가 화폐로 사용되었다. 매우 성기고 거친 포라는 뜻인데,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 화폐로 통용됐던 것에서 화폐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1592~1598)으로 명나라 군대가 원군으로 왔을 때 군자금으로 은이 대량 유입되었다. 중국은 은을 조세로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는 은화를 주조하지는 않았으며 민간에서 은의 순도와 무게를 평가하여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15세기에 동전 주조가 중단되고 국제수지 흑자와 금과 은의 가격 차이로 인해 은이 유럽과 일본에서 대량으로 유입되어 화폐로 광범하게 사용하게 된 것이다. 지역 내에서는 동전, 지역 간 그리고 국제무역에는 은이 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중국의 동전을 수입하여 화폐로 사용했는데 14세기 중엽에 이르면 중국 동전이 전국에 유통되었다. 중국에서 15세기에 동전 주조가 정지된 후에 쌀이 화폐로 사용되는 체제로 회귀하고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됐다. 17세기 전반기부터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시대엔 사무라이는 금, 상인은 은, 일반인은 동전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삼화(三貨)제도라고 한다. 이와 함께 지방 영주가 발행한 지폐인 번찰(藩札)이 지방에서 통용되었다.
상평통보를 발행했을 때 동전의 가치를 쌀 1말=은 1전=상평통보 4전으로 규정하고 있듯이 은의 통용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후 중국과 일본을 매개하던 중계무역이 18세기 초부터 감소함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은 유입이 급감하여 18세기 중반에는 두절되었다. 결국 동전만 남게 되어 고액 거래에도 동전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됐으며, 국제무역에는 홍삼이 은을 대체하였다.
상평통보 보급 확대는 시장경제 발전 덕분
동전은 실물화폐 중에서 쌀이나 포목보다 한 단계 발전한 금속주화였지만 금화나 은화에 비해 너무 가치가 낮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일상과 관련된 지역 내 소액 거래나 조세 납부에는 적합하지만 지역 간 원거리 무역이나 국제 무역에는 사용되기 어려운 화폐였다. 상평통보 1개의 무게는 본래 2돈5푼이었는데 조금씩 가벼워져 순조대 초에는 1돈2푼이 됐다(1돈=10푼=3.75g). 동전 1개의 무게를 1돈으로 계산하더라도 100냥은 37.5㎏이 된다(동전 1만개). 100냥은 대략 쌀 20석의 가치에 해당하였는데, 이 정도가 한 사람이 운반할 수 있는 최대량이었다. 개항기에 인부 한 명이 최대 120냥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조금만 큰 규모의 거래에는 동전을 운반하기 위한 짐꾼이나 소나 말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불편을 덜기 위하여 환(換)이나 어음이 서로 신용할 수 있는 상인 사이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데 성공했던 것은 추포와 은을 화폐로 사용한 경험이 있었고 시장의 발달이 진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8세기부터는 채소나 소금과 같은 물건을 사는 데도 곡물이 아닌 동전을 달라고 할 정도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현물거래에 계산단위로 동전이 사용되었다. 국가 입장에서도 동전은 쌀이나 포목에 비해 가볍고 오래 저장할 수 있으며 품질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흉년이 들어 쌀이나 포목을 조세로 거두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료만 있으면 주조하여 구매력을 만들 수 있었고 곡식을 구입해 진휼하기에도 편리했다.
국가재정에서 동전 비중은 3분의 1 정도
그렇지만 공식적인 재정에서 차지하는 동전의 비중은 18세기 동안 대략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19세기에 동전의 비중이 다소 높아졌지만 갑오개혁 직전에도 절반 정도였다. 조선왕조는 모든 조세를 동전으로 거두어 단일한 회계단위로 재정을 운영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국가재정을 완전히 시장에 의존해야 할 뿐 아니라 동전 가치의 안정적인 유지에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1810년대 함경남도 갑산의 구리 광산이 개발되기까지는 동전 공급의 부족으로 전황(錢荒), 즉 디플레이션을 피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영조(재위 1724~1776)는 동전을 폐기하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익을 좇아 풍속을 해치고 동전이 모두 부자들의 수중에 들어가 고리대의 수단으로 사용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동전의 가치가 높아지자 국가가 앞장서 동전을 축적하고 있었다. 1782년 서울의 중앙관청이 가지고 있는 동전이 136만냥, 지방관청이 보유한 동전이 470만냥이었다. 당시 동전 총량이 700~800만냥 정도였다고 추정되므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장부상으로는 동전의 8할을 국가에서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쌀을 대량으로 저장하여 환곡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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