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경제체제 대신해 세계경제 이끌 '한일 통합경제권' 대안
소통의 부재, 극단적 인식 확산이 문제… 미래비전 공유 필요
일본경제 장단점 정확히 파악해 한국 선진국 도약 반면교사로
“한일관계가 역사적·정치적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자칫 양국의 경제적 문제까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 그래선 안 된다. 경제는 필요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경제논리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 한일 양국 경제협력의 제1원칙은 철저한 정경 분리다.”
한일 관계 전문가들은 양국 경제협력의 해법을 ‘경제 논리’와 ‘정경 분리’로 정리했다. 독도?위안부 문제, 일본의 우경화 논란 등 양국 간 갈등에 매몰돼 경제까지 손을 놓아선 안 된다는 것. 감정에 치우친 선입견을 배제하고 양측이 합의 가능한 실용적 경제 교류부터 시작하는 게 우선. 이들은 이런 접근 방식이 경색된 양국 관계에 물꼬를 틀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경닷컴이 주최하고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한국도요타자동차, 숙명여자대학교가 후원한 ‘2014 일본경제포럼’이 10일 숙명여대 제2창학캠퍼스 삼성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살아나는 일본경제, 한일 경제협력 방안은’이란 주제로 개최된 이날 포럼에선 △양국 간 소통 부재와 극단적 인식 확산을 극복하는 미래비전 합의·공유 △한국의 선진국 도약을 위한 반면교사로서 일본경제의 장단점 인식 △새롭게 세계경제를 이끌어 나갈 ‘한일 통합 경제권’ 구축의 당위성과 필요성 등 단계별 해법과 대안이 제시됐다.
◆ '한·일 하나의 경제권' 과당경쟁 피하고 시너지 낸다
첫 강연자로 나선 이종윤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사진)은 ‘2014년 일본경제 현황과 한일 경제협력 방안’ 주제 발표에서 “한일 양국이 정치적·외교적으로 불편한 것과 별개로 경제는 철저히 합리적인 관점에서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일관계를 부부관계에 비유해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한일 양국은 인접 국가로 오랫동안 지내며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같은 시장경제체제와 함께 유사한 산업구조를 갖고 있는 나라들” 이라며 “그만큼 협력을 통해 상생할 수 있는 관계가 바로 한일관계”라고 말했다.
공통점을 지니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한국과 일본이 하나의 경제권을 만들어 ‘동아시아 경제공동체’의 가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못지않은 역내 경제협력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설명이 뒤따랐다.
이 부회장은 “유럽과 미국이 주도하던 기존의 구미 경제체제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체력이 떨어졌다. 이들의 공백을 대신해 세계경제를 이끌어갈 존재가 필요한데, 동아시아 경제공동체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며 “한국과 일본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해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심점이 돼야 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한일 양국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될 경우 발생하는 이점으론 △제3국에서의 과당경쟁 방지 △생산기지 리스크 분산 △한일 기업 주도 표준화 △제3국 공동 진출 △비교 우위를 살린 시너지 효과 등을 꼽았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유사한 산업구조를 갖고 있어 제3국에서 격돌하면서 과당 경쟁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 며 “한일이 하나의 경제권이 되면 출혈 경쟁을 피하고 비교 우위에 의해 산업을 특화할 수 있다. 한국의 순발력, 일본의 계획성 등 서로의 장점을 결합하면 시너지 효과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정보화 시대에 표준화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한일 양국의 기술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국제 표준을 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내수 규모이므로 양국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되면 확실한 메리트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부회장은 “제3국에 공동진출 하거나 천재지변이나 국방 문제에 따른 생산기지 리스크를 분산하는 효과도 있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저항이 적고 접근이 쉬운 단계부터 차근차근 교류를 활성화 해나가는 방안을 제시했다. 양국 간 장기체류가 가능한 ‘노(NO)비자 그룹’ 확대, 공동 테크노마크 설립을 비롯한 양국 연구자·기술자·기능인력 데이터베이스화 등이다.
이 부회장은 “한일관계를 경색시키고 있는 역사적 정치적 외교적 과제에 얽매이면 양국 관계는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다. 유럽은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EU를 만들지 않았느냐” 며 “이미 협회 차원에서도 양국 경제인들이 하나의 경제권을 만들자는 공동성명을 낸 바 있다. 경제 문제는 철저히 경제논리로 접근해 공감대를 형성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 일본 인식 경직돼… '경제가 출구' 발상의 전환 필요
“한일관계 경색은 소통의 부재와 극단적 상호인식의 확산 때문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반드시 역사인식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만 경제협력을 포함한 교류에 나설 수 있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다. 오히려 철저한 정경분리를 통해 경제협력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다른 여러 갈등요인들이 축소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이원덕 국민대 교수(일본학연구소장·사진)은 한일간 갈등의 구조적 배경을 정확히 분석해 ‘각개격파’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극대화된 양국의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나 ‘뭉뚱그려진 인식’이 한일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그는 “우리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보면 일본은 우경화·군국주의화와 같은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아베라는 극우적인 지도자가 이끌고 있다는 식으로만 보고 있다” 고 전제한 뒤 “지나치게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서 파악하는 것은 문제다. 각각의 사안이 갖는 나름의 논리와 배경을 분석해 대처해야 하는데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고 꼬집었다.
예컨대 일본의 집단자위권 도입은 최근 미일동맹 차원의 안전보장정책이나 센카쿠(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간 대립 등의 맥락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 모든 사안을 일본의 우경화나 군국주의화와 연결시키면 마땅한 해법이 없고, 끝내 관계 경색으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이 소장은 “최근의 한일관계 경색은 단순히 양국 간 관계에서 원인을 찾기보다는 동북아 지역 국제체제의 변동 속에서 분석할 때 제대로 전말이 드러난다” 며 “중국이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상대적으로 일본의 힘이 쇠퇴했다. 크게 보면 냉전 시기 한·미·일 동맹이 현재의 ‘미중 양강구도 속에 갇힌 한일관계’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일관계의 조정능력이 최근 들어 약해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는 “1965년 국교 수립 후 한국과 일본은 막후 조정이나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 타협해 왔다” 면서 “최근 양국 간 인적 네트워크가 크게 약화되면서 특수했던 한일관계가 보통의 이국 관계로 변화됐다. 갈등 발생시 문제해결능력이 저하됐음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들어 단 한 차례도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그는 “역사인식 문제 등 갈등 요소가 해결돼야만 정상회담 한다는 건 ‘입구론’이다. 거꾸로 ‘출구론’의 관점에서 정상회담이 열릴 필요성도 있다” 며 “정상회담에서 무라야마 담화 계승을 제안할 경우 일본 측이 거절하기 쉽지 않다. 아베의 폭주를 제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교수는 또 “일본에선 한국이 중국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이른바 ‘중국 경사론’ 때문에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며 “한국은 중국을 빼놓고 경제적 미래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중국에 대한 대외의존도가 높지만, 내수경제 중심인 일본은 이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부분을 정확히 어필하고 다방면으로 오해를 푸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귀띔했다.
그는 특히 △역사 문제 등과 경제의 분리 △아베 정부와 전체 일본의 분리 △정상회담과 다른 여러 경로를 통한 노력의 분리 등 ‘3대 분리외교’를 당부했다. 이원덕 교수는 “내년이 한일수교 50주년이다. 이를 계기로 양국 간 미래를 공유하는 ‘21세기 한일 신시대 선언 2015’(가칭)가 채택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원칙·기초체력' 일본경제 강점 객관적 파악·수용해야
도쿄 특파원을 지낸 최인한 한경닷컴 뉴스국장(사진)은 일본경제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해 한국의 선진국 도약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디어가 일본에 대한 감정적 판단을 배제하고 객관적 잣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 국장은 일본경제의 강점을 원칙이 중시되는 매뉴얼 사회, 제조업 기반의 튼튼한 기초체력, 장기적 경영 등에서 찾았다.
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 3년이 훨씬 지났지만 NHK는 지금도 지진 현장을 찾아가는 기획 프로그램을 매일 방송하고 있다. 당시엔 사고를 겪었지만 앞으로는 이런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볼 수 있듯 원칙이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던 한국도 이런 태도는 되새겨봐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대지진 당시 현지 취재를 한 최 국장은 “국내 보도는 대부분 ‘일본 침몰’ ‘일본 열도 가라앉다’ 같은 비관적 톤이었고 일본 경제가 입는 타격도 엄청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며 “하지만 직접 목격한 일본은 특유의 장점인 질서의식, 공동체 의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이었다. 잠깐 세계1위 자리를 내줬다가 되찾은 도요타처럼 일본 기업들도 힘을 냈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은 역동적이고 임기응변에 강한 장점이 있는 반면 확률이 낮은 위험 요소는 무시하는 면도 있다. 그런 성향이 세월호 참사를 부른 것” 이라며 “일본과 같은 매뉴얼 위주, 원칙 중심 사회였다면 세월호 사태에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라 본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한국 기업은 성장 지향적인 반면 일본 기업은 ‘영속(永續)’을 중시하는 차이점이 있다. 그런 문화 차이가 삼성이 단시일에 일본 유수의 대기업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한국의 대기업이 상대적으로 경제위기에 약한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며 “단기 실적이나 주가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구조가 과연 좋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이어 “일본은 연구·개발(R&D)의 기초가 탄탄하다. 실제로 미국 독일 일본 같은 제조업 강국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지 않느냐” 며 “이런 기초체력 때문에 일본경제가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은 ‘차이나 리스크’가 될 수 있어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 최고점을 찍은 1990년대 초반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한국경제를 앞선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 그는 “무조건 일본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실체를 제대로 알면 한국의 미래도 보인다. 규제가 많고 폐쇄적인 일본의 약점은 버리고 강점인 R&D 기초체력이나 장인정신, 매뉴얼 사회 등의 강점은 취하는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날 처음 열린 일본경제포럼은 향후 세부 분야별 주제를 정해 지속적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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