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나 기자 ] “응~나 일하고 있어, 잠깐마아아안~.”
지난 토요일, 지오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토이저러스에 갔다. (미안해, 지오야. 처음이라니.)
금요일, 할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간다고 나섰다가 난생 처음 가 본 토이저러스에 입이 떡 벌어진 지오는 다음날 나에게도 가자고 성화를 해 댔다.
지오도, 나도, 감기 기운에 늘어져 있다가 오후 4시에야 집을 나섰다. 토요일이긴 하지만, 동생처럼 지내는 친한 대표가 모 방송인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편안한 자리이니 함께 만나자고 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주말만은 아이에게 충실하고 싶지만, 어찌 보면 ‘정색한 업무들’보다 더 중요한 자리여서 빠지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지오야, 오늘은 그럼 피곤하니까, 집에 있고, 내일 가자.”
종종 쓰는 ‘최후의 엄포’ 화법에 화들짝 놀라서 집을 나선다. 엄마 손을 잡고 만원 지하철에 부대끼면서도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들래미. “엄마랑 나들이 가네에~” “퇴근시간이라 사람 많은거야?” 라고 종알종알하면서 토이저러스에 도착했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장난감 비행기에 앉은 지오는 다른 아이들처럼 동전을 넣고 움직이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앉아서 핸들을 돌리는 게 즐거운 거다. 넓은 매장을 돌아다니며, 작은 자동차도 타 보고, 미니 피아노에 앉아서 건반도 두드리며 1시간을 훌쩍 보낸 지오. 다행히, 사 달라고 조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그마한 미니 노트북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놀길래, “지오야, 뭐해?”라고 물었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나 일하고 있어, 잠깐마아아안~” 이란다. 그 모습에서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지오야? 엄마가 집에서 그래? 엄마가 언제 그랬어?”
지오는 “응” 하더니, 갑자기 엄마가 일한다고 자신에게 서운하게 대한 것이 떠올랐는지, “오지 마” 하면서 다른 통로로 걸어가 버린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가 말을 할 때면, 멈추고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보다. 찬찬히 돌아보니, 언젠가부터인가 “지오아, 미안해. 엄마 기사 좀 넘기고.” “지오야, 잠깐만, 잠깐만...” 이런 말들을 했던 것 같다. 그 ‘일’이라는게 대체 뭔지 알 턱이 없는 지오에게 설명을 해 주고 싶어서, 어떤 날은 ‘편집장 글’에 아이 이야기를 쓴 매거진을 가져가서 보여주기도 했고, 사이트 개편을 하던 주말에는 아이 손을 이끌고 사무실에 나온 적도 있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일’은 ‘내 엄마를 나에게서 뺏어가는 그 무엇’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목도하고야 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오는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는 길에, 제 할머니 손을 끌고 엄마의 사무실이 있는 충정로역에서 놀다 간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할머니에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응, 지오 회사는 학여울 역에 있어. 2009년에 다녔어”라고 말하면 웃고 말았지만, 갑자기 이 아이의 외로움이 전달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지나친 감상일지도 모른다. 토이저러스에서 나오는 길에, 어떤 엄마를 보고 아이는 말을 건다. “난 이제 집에 가려고. 일을 다 했거든.”
낯선 이를 보면 엄마 뒤로 숨어 울먹였던 아이가, 제법 어린이 말투로 이렇게 말하다니.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지오야, 저 아줌마 누구야?”
“나도 몰라. 이제 키즈 카페 가자.”
남편 말대로, 아이는 그냥 아이일 뿐, 내가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프랑스 아이처럼’이라는 책에서 지적했듯, 아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면 안 된다는 이런 마음씀씀이는, 사실, 정신분석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는 미국식 육아법의 영향일 뿐일지도. 그 트라우마로 평생 아파할 것이라는 전제가, 아이를 떠받들게 만들고, 그게 오히려 아이를 불편하게 한다는 그 지적에 끄덕여 놓고도, 아이가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면 마음이 아파지는 건 엄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일 터. 프랑스 엄마처럼, 하이힐을 신고, 지오에게 당당히 이렇게 외치는 나를 상상해 본다.
“기다려! 엄마 인생도 니 인생만큼 중요하거든?”
(근데, 네 살짜리가 이해할 내용인가?)
이재원 < 텐아시아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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