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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올리비에와 무대 위서 키운 사랑…이별 뒤에도 그리움만 쌓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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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스토리 - 예술가의 사랑 (38) 비비언 리



“대체 저 남자 배우 누구지. 어쩌면 저렇게 잘 생겼을까. 게다가 저 수심에 잠긴 표정은 나에게 마술을 거는 것 같아. 아, 저런 남자와 사랑을 불태울 수만 있다면….”

연극을 관람하던 신참배우 비비언 리(1913~1967)는 공연 내내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얼굴도 볼거리 하는 아이처럼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냥 무대 위의 연기자를 본 것뿐인데 그렇게 마음을 뒤흔들어놓다니. 문제의 배우는 바로 로렌스 올리비에(1907~1989)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리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올리비에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공교롭게도 리의 연극을 보기 위해 객석에 앉아 있었다. 연극이 시작된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아,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저건 사람이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그는 리의 경이로운 외모에 넋이 빠졌고 그 불가사의한 매력에 속절없이 빨려들었다.

세기의 연기자 비비언 리와 로렌스 올리비에는 그렇게 만나기도 전에 서로에게 매혹됐다. 비너스의 사주를 받은 큐피드가 둘의 심장에 화살을 날린 게 분명했다. 올리비에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며 리에게 먼저 다가가 연기가 멋지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사랑의 불꽃이 격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점화되는 순간이었다. 곧 이어 둘은 연극 ‘잉글랜드 대화재’의 주역으로 캐스팅되면서 무대 위에서 마음껏 사랑을 나눈다. 연극이 끝났을 때 둘은 이미 뗄 수 없는 사랑의 포로가 돼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앞에는 커다란 난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둘은 이미 품절녀 품절남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비교적 순탄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리는 변호사인 허버트 리 홀만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리며 아이까지 둔 상태였다. 올리비에 역시 유능한 연기자로 인정받던 질 에스먼드를 부인으로 둔 기혼자였다. 큐피드의 장난에 애꿎게도 두 사람의 배우자들이 재앙을 맞이한 것이었다. 리와 올리비에는 저마다 상대를 설득했지만 배우자들은 이혼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둘은 비밀리에 동거하며 사랑을 나누는 한편 무대 위에서도 파트너가 돼 성공가도를 달린다. 1939년은 두 사람의 연기 인생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었다.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은 것이다. 리는 마거릿 미첼의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 역을, 올리비에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히드클리프 역을 맡았다. 리는 영화를 찍는 동안 변덕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영화가에서 악명을 얻었지만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고 그는 탁월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그에게 돌아간 것은 당연했다. 리는 이제 올리비에를 능가하는 국제적인 스타로 각광받게 된 것이다.

한편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일과성으로 끝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배우자들은 이혼을 받아들인다. 리와 올리비에는 1940년 절친한 친구인 캐서린 헵번과 가슨 카니 두 친구만을 증인으로 세운 채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은 너무나도 짧았다. 병마가 리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이다. 시련의 시작이었다. 리는 심각한 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잦은 히스테리로 올리비에를 고통에 빠뜨렸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폐결핵을 앓던 리는 연기를 중단해야 하는 때도 잦았다. 역경이 닥칠 때마다 올리비에는 위기를 사랑의 힘으로 감싸안았다.

둘 사이에 결정적인 금이 간 것은 1948년 영화 투자자금을 모으기 위해 함께 호주에 갔을 때였다. 이때 순회공연도 겸했는데 하루는 리가 무대에 서길 거부하자 분개한 올리비에가 리의 뺨을 갈겼고 리도 질세라 남편의 뺨을 후려쳤다. 돌아와서 얼마 후 리는 올리비에에게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는 뼈아픈 한마디를 던졌다. 훗날 올리비에는 그때 그 말을 듣는 순간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고 고백했다.

둘의 관계는 그렇게 싸늘하게 식어갔지만 그 후에도 10년 넘게 동거하며 연극과 영화의 파트너로 유대감을 이어갔다. 그러나 1960년 둘은 관계가 끝났다고 판단, 마침내 이혼에 합의한다. 이후 둘은 새로운 파트너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늘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다고 한다. 서로에게 지쳐서 헤어졌을 뿐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리는 1968년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직전 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올리비에 없이 오래 사느니 차라리 그와 함께 살다 일찍 죽는 게 낫다”며 올리비에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했다.

리를 잊지 못하기는 올리비에도 마찬가지였다. 리의 부고를 접했을 때 올리비에는 전립선 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소식을 듣자마자 병실을 박차고 나와 그의 시신 앞에서 절규했다고 한다. 말년에도 그는 리를 잊지 못했다. 1986년 그의 집을 방문한 지인은 텔레비전 앞에서 리의 영화를 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는 올리비에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에게 진정한 사랑은 오직 리뿐이었던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추억 속의 별이 되었다. 하지만 둘은 여전히 팬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린 사랑의 영화를 찍었던 게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영화화했던 거야”라고.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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