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터키 물가 급등·리라 폭락에 흔들리는 에르도안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문제는 경제다.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1992년 대선에서 사용한 슬로건이다.
표심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은 결국 피부에 와닿는 경제 상황이라는 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선거 문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30년이 지난 오늘날 터키의 정치·경제 상황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됐다.
터키 경제가 리라화 가치 폭락과 물가 급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면서 19년째 장기 집권 중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터키의 여론조사 업체인 메트로폴이 지난 4일(현지시간)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율은 37.9%로 2015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면,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의 만수르 야바스 앙카라 시장과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의 지지율은 각각 60.4%와 50.7%로 나타났다.
모두 2023년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강력한 경쟁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인기가 하락세를 그리면서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의 지지도 역시 추락하고 있다.
다른 여론조사 기관인 사회정치분야연구소의 조사에서 AKP의 지지율은 27%에 그쳤으며, AKP와 연립 여당을 구성하는 민족주의행동당(MHP)의 지지율은 6.3%로 나타났다.
같은 조사에서 CHP의 지지도는 22.9%였으며, CHP와 연대한 '좋은당'(IYI)의 지지율은 10.3%를 기록했다.
19년째 여당 자리를 지킨 AKP-MHP의 지지율과 CHP-IYI 연대의 지지율이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이다.
해당 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3분의 2가 터키의 가장 큰 문제로 '경제'를 꼽았으며,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현 정부의 정책이 경제 상황을 개선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터키 경제는 리라 폭락과 물가 급등에 휘청였다.
2021년 초 1달러당 7.4리라에 거래되던 리라화는 연말에는 1달러당 13.6리라 선에 거래됐다. 이는 1년 사이 리라화의 가치가 약 45% 하락한 것을 의미한다.
연간 물가 상승률은 19년 만에 최대치인 36.08%를 기록했다.
특히, 국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식료품비는 연간 43.8% 상승했으며, 교통비는 53.66% 급등했다.
문제는 터키 경제의 난맥상이 에르도안 대통령의 의지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는 점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고금리가 고물가를 유발한다'는 신념을 고수하고 있으며, 물가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중앙은행에 기준금리 인하를 요구했다.
그의 요구에 따라 터키 중앙은행은 지난해 9월부터 넉 달 연속 금리를 인하해, 19%이던 기준금리를 현재 14%로 낮췄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념과 달리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리면 시중 통화량이 증가해 물가가 오르고, 외국환 대비 자국 화폐의 가치는 하락한다.
결국 터키 경제는 기준 금리 인하→리라 가치 하락→수입 물가 폭등에 따른 물가 상승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좀처럼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념이 터키 경제는 물론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위기로 몰아넣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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