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일본] 영문도 모르고 희생된 목숨…열도 위협하는 방화
참사로 이어진 극단적 선택…'안전한 국가' 평가에 의문
전체 화재의 11.7%가 방화 또는 방화 의심 화재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지진 등 자연재해를 빼면 일본은 꽤 안전한 나라로 평가받는 편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계열의 싱크탱크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2년마다 한 번씩 발표하는 '안전한 도시 지수'(Safe Cities Index)를 보면 일본 수도 도쿄(東京)는 2015년, 2017년, 2019년 3회 연속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서일본의 중심지인 오사카(大阪)는 같은 기간 3위를 유지했다.
서울도 2019년에 8위를 기록하는 등 비교적 상위권이었지만 일본 주요 도시는 이보다 더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경찰, 소방, 자위대 등을 중심으로 한 사건·사고 및 재난 대응 시스템이 비교적 호평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은 밤늦은 시각에도 별 두려움 없이 외출할 수 있는 국가로 여행안내서 등에 소개된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일본이 안전하다는 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지난달 오사카의 한 복합건물에 있던 의료시설에서 발생한 방화 살인 사건은 일본 사회의 안전 시스템에 경종을 울렸다.
25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용의자로 지목된 다니모토 모리오(谷本盛雄·사망 당시 만 61세)도 일산화탄소 중독 등의 영향으로 숨지면서 그가 사건을 일으킨 동기 등을 규명하기 더 어려워졌다.
최근까지 현지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진 내용을 종합하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니모토는 2011년 4월 장남을 흉기로 살해하려고 한 혐의(살인 미수)로 체포됐으며 징역 4년의 확정판결을 받은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
아사히(朝日)신문에 의하면 판결문에는 다니모토가 "고독감 등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게" 됐으며 "죽는 것이 무서워서 좀처럼 자살을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를 죽이면 죽을 수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고 기재됐다.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선택 앞에 일본 사회의 범죄 예방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셈이다.
25명이 영문도 모르고 희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다니모토가 다수의 목숨을 뺏기 위해 사전에 계획한 결과로 보인다.
모방 범죄 우려 때문에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진화를 방해하거나 사람들이 피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한 흔적이 수사 과정에서 속속 확인됐다.
게다가 사건이 발생한 건물은 소방법상 피난 설비 등 설치 의무가 없던 1970년대에 지어져 애초 화재에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충격적인 방화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2019년 7월에는 아오바 신지(靑葉眞司)가 교토(京都)에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회사 교토 애니메이션의 스튜디오에 침입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면서 36명이 목숨을 잃고 32명(아오바를 제외한 인원수)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국은 휘발유를 차량에 바로 주입하지 않고 휴대용 용기에 채워주는 방식으로 판매하는 경우에는 구매자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사용 목적 등을 기록하도록 하는 제도를 2020년 2월부터 시행했다.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다니모토는 이런 규제를 피해 휘발유를 입수한 것으로 파악됐다.
교토 애니메이션이나 오사카 복합건물처럼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 외에도 일본에서는 크고 작은 방화가 이어지고 있다.
2015년 6월에는 도쿄에서 출발해 오사카를 향하던 고속철도 신칸센(新幹線)에서 71세 남성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이 남성은 물론 무고한 여성 승객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서른 명 가까운 승객·승무원이 연기를 들이마셔 일산화탄소 중독 등의 피해를 봤다.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작년 10월에는 도쿄의 한 전철에서 20대 남성이 유류를 뿌리고 불을 질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규슈(九州) 신칸센에서 60대 남성이 방화를 시도하다 붙잡혔다.
일본 총무성이 작성한 소방통계를 보면 2020년 일본에서 3만4천691건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 가운데 약 7.2%인 2천497건이 방화인 것으로 분석됐다.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는 1천555건(4.5%)이었다.
방화와 방화 의심 화재를 합하면 전체 화재의 11.7%인 4천52건에 달했다.
한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방화에 의한 화재 비율이 높다.
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2020년에 3만8천659건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 가운데 방화는 377건(1.0%), 방화 의심 화재는 381건(1.0%)이었다.
일본의 방화나 방화 의심 화재를 장소별로 분류하면 일반 주택이 536건(13.9%)으로 가장 많았고 공동주택이 397건(9.8%)으로 뒤를 이었다.
병원 등(20건), 사회복지시설 등(17건), 학교(18건) 등 불특정 다수가 모이거나 사회적 약자 등이 이용하는 시설도 여러 건 방화 대상이 됐다.
오사카나 교토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참사가 언제든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극장, 쇼핑몰, 사무실, 병원, 열차 등 일상의 공간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게 될 수 있는 방화가 지진이나 화산과 같은 자연재해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끼는 이들도 꽤 있을 것 같다.
근래에 이어진 방화 사건이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년 8월 EIU가 발표한 안전한 도시 지수 2021년 결과를 보면 도쿄는 5위로 오사카는 17위로 처졌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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