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란 잘란] 인도네시아 전통 바틱이란…"철학과 인생 담겨"
인도네시아 밀랍 염색 기법 바틱,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 편집자 주 : '잘란 잘란'(jalan-jalan)은 인도네시아어로 '산책하다, 어슬렁거린다'는 뜻으로, 자카르타 특파원이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하는 연재코너 이름입니다.]
(자카르타=연합뉴스) 성혜미 특파원 = 인도네시아에서는 매주 금요일 학교·관공서·회사 등에서 '바틱 데이'(Batik day)를 운영한다.
이날은 전통섬유 바틱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학교에 가거나 출근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금요일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바틱을 즐겨 입으며, 공식적인 행사나 회의 때도 드레스코드를 바틱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바틱 사랑이 넘친다.
인도네시아 바틱은 일종의 초(밀랍) 염색 기법이며 식물·동물·기하학무늬 등 수 천개가 넘는 문양과 다양한 색을 가진다. 2009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바틱 천으로 만든 옷의 가격은 천차만별인데, 전통방식으로 만든 제품은 수 백만 원을 호가한다.
실제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한 마음에 19일(현지시간) 자카르타 남부에서 매주 월·금요일 운영하는 '전통 바틱 교실'을 찾아갔다.
바틱 전문가 하밈(47) 선생님은 2015년부터 수업을 진행,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중심적으로 참여하다가 현재는 자카르타 거주 외국인들이 바틱 제작을 즐기러 온다.
먼저 수 백개의 패턴 가운데 원하는 것을 고르고, 그 위에 천을 올려놓고 연필로 따라그린다.
하밈씨는 "바틱 문양은 각 섬, 지역마다 다르다. 나는 그동안 500여개 문양을 바틱으로 수제작 했는데, 1천500개를 제작한 친구도 있다"며 "과거에는 왕족들만 쓸 수 있는 바틱 문양이 정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이지 않으냐"고 말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할머니로부터 바틱 제작을 배웠다는 그는 "바틱은 그냥 바틱이 아니다.(Not just batik) 각각의 문양에는 역사와 철학이 담겨 있다"며 "바틱을 만들면서 인내심을 배우고, 마음 수양을 하고,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바틱 수업에 참여해보니 하밈 선생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창문이 열린 교실에는 밀랍을 끓이는 화로를 중심으로 작은 의자가 둥글게 놓여 있었다.
끓는 밀랍을 짠띵(Canting)이라는 도구에 넣어 펜촉처럼 사용, 연필로 그린 밑그림을 따라 밀랍 액으로 선을 그린다.
짠띵을 잘못 기울이면 밀랍 액이 듬뿍 나올 수 있어 조심조심 그려야 한다.
체험을 위해 단발성으로 참가한 사람은 작은 천에 단순한 문양을 따라 그리지만, 한 번 체험해 보고 바틱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커다란 천에 원하는 문양을 그려 넣고 수개월에 걸쳐 한 작품을 만든다.
캐나다, 뉴질랜드, 일본, 인도, 한국 여성들이 몇 달째 고정 멤버로 참석 중이다.
1년 반째 수업에 참여 중이라는 교민 박소영(39)씨는 "바틱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 집에서 밀랍을 끓이면 연기, 냄새가 나기 때문에 매주 두 차례 수업에 참석해 5시간씩 공들이고 있다"며 작년 9월부터 만들고 있는 작품을 보여줬다.
그는 "컴퓨터로 프린트하면 같은 무늬가 수 천장씩 나오겠지만, 바틱은 오랜 시간을 투자해 단 한 장을 만든다"며 "만들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색깔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 또한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캐나다인 데브라씨는 "작년 9월부터 거북이와 새를 그렸는데, 이제 마지막 염색을 앞두고 있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틱 수업 참가자들은 바틱 제작을 '시간의 축적'이라고 표현한다.
밀랍 액으로 선을 따라 그린 뒤 노란색 등 가장 옅은 색부터 염색한다.
염색 후 천을 끓는 물에 넣으면 밀랍 액으로 그린 부위만 흰색으로 남는다.
말린 뒤 다시 그 천 위에 밀랍 액으로 선을 그리고, 그다음 색으로 염색한 뒤 끓인다.
노란색, 분홍색, 갈색, 파란색 등등 점점 진한 색으로 염색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천 위에 다양한 색과 무늬를 표현한다.
옅은 색깔을 남기려면 그다음 염색을 할 때 밀랍 액으로 해당 부위를 다시 덮어야 한다.
그래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큐브를 맞출 때처럼 어떤 단계로 그리고 염색할지 생각을 잘해야 한다.
한 명씩 제작을 도와주던 하밈씨는 "바틱을 만들다 보면 생각과 다른 결과가 나올 때가 있다"며 "그게 바로 우리 인생과 같다. 그럴 땐 다시 차례차례 시작해야 한다"며 싱긋 웃었다.
이날 체험 수업에 참여한 김유미(51)씨는 "직접 해보니까 핸드메이드 바틱 제품이 왜 비싼지 알겠다"며 "인도네시아인들의 바틱 사랑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noano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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