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태국 '레드불 유전무죄'와 싱가포르 '백만장자 갑질'
수사와 재판과정서 '공정·정의' 가치 훼손으로 여론 공분 '닮은 꼴'
(방콕=연합뉴스) 김남권 특파원 = 태국과 싱가포르에서 최근 여론의 공분을 산 '닮은 꼴' 논란이 발생했다.
태국의 '레드불 3세 뺑소니 사망사고 불기소'와 싱가포르의 '백만장자 집 절도 가정부 무죄 판결'이 그것이다.
세계적 스포츠음료인 레드불 공동 창업주의 손자는 8년 전 술과 마약에 취한 채 외제차를 몰고 과속하다 방콕 도심에서 경찰을 치어 숨지게 했다.
그 손자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해외 도피 중인데, 검찰은 7월에 공소시효가 2027년까지인 과실치사 혐의도 불기소해 뭉개려 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법망도 피해갈 수 있다는 전형적인 '유전무죄'였다. 반정부 집회에서까지 거론되며 태국 정부를 압박했다.
싱가포르의 경우는 이른바 '갑질'이다.
백만장자 부잣집 아버지와 아들이 인도네시아 가정부가 말을 안 듣는 게 괘씸해 도둑으로 몰아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분가한 자신의 집도 청소를 하라는 아들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해 절도범 누명을 쓴 가정부가 4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결백을 입증받으면서 여론이 분노했다.
들여다보면 두 사건은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가해자는 돈 많고 권력 있는 이들이고, 피해자는 그 반대다.
뺑소니 사망사고를 낸 오라윳 유위티야(35)는 레드불 공동 창업주의 손자다.
오라윳 일가는 6천170억바트(약 23조원)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국 두 번째 부호다.
가정부를 도둑으로 몬 리우문롱(74) 회장은 싱가포르 창이공항 그룹의 수장이었다.
건설팅과 부동산 업체 임원에다 국부펀드 테마섹의 선임 자문역이기도 했다. 언론은 그를 백만장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무죄 판결로 논란이 커지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와 비교해 레드불 사건 피해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순찰 업무를 하던 40대 중반 경찰관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 가정부 파르티 리야니(46)의 사정은 더 딱하다.
월 급여가 600싱가포르달러(약 51만원)로 싱가포르 국민과 비교해 한참 낮다.
리우 회장과 가정부 간 법정 투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교되기도 했다.
두 논란을 공히 관통하는 것은 불공정과 정의의 실종이다.
태국 진상조사위는 레드불 사건에서 정부 관계자는 물론 검찰, 경찰, 변호사 등의 조직적인 비호 및 음모가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온라인 매체가 공개한 2012년 뺑소니 사망사고 당시 대화록에는 담당 경찰들과 검사가 차량 속도를 줄이기 위해 증거 조작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싱가포르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 격인 항소법원 판결에 따르면 도난 신고된 DVD 플레이어의 경우, 고장 나 버린 걸 주웠다는 파르티 주장이 맞았음에도 검찰은 재판 때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고장 난 제품을 훔쳤을 리 없다는 합리적 추론을 가로막은 것이다.
판사는 "교묘하게 속이는 방법을 사용했고, 이는 피고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경찰은 인도네시아인인 파르티를 조사하면서 말이 다른 말레이어 통역원을 붙여줄 정도였다.
두 사건은 양국 수사 당국 및 사법부의 신뢰성에 타격을 줬다.
많은 태국 국민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며 냉소적 반응도 나타냈다.
적지 않은 싱가포르인은 이번 사건을 부자와 엘리트 계층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힌 전형으로 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양국 정부는 유사 사건 재발 방지를 다짐한다.
태국의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고, 싱가포르의 K. 샨무감 법무부 장관은 경찰과 검찰 수사 과정을 점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선입견'이 공정성 훼손에 영향을 줬는지도 되새겨봐야 할 부분이다.
이런 기류를 고려한 듯 23일 싱가포르 항소법원은 미얀마 가정부의 눈과 얼굴을 지속해서 때린 싱가포르 집주인에 대해 앞서 고등법원이 선고한 징역 8개월에서 14개월로 형량을 높였다.
공정과 정의는 법 앞에 서야 하는 이들에게, 특히 힘없고 돈 없는 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다.
국민들은 두 논란을 보고 "만약 내가 그 피해자였다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공정과 정의가 실종될 때 다른 어떤 사안보다 국민들이 분노한다는 점을 태국과 싱가포르의 '닮은 꼴' 두 사건은 잘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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