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정부, '검은비' 피폭 확대 인정 1심에 불복…비판론 확산
'피폭 특례구역 바깥 주민도 원호 대상" 1심 판결 불복 항소
변호인단 "피해자 짓밟는 처사"…주요 언론도 항소 취하 요구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일본 정부가 1945년 8월 미군의 히로시마(廣島) 원폭 투하 직후 내린 방사성 물질을 함유한 '검은 비'(방사성 낙진비)를 국가 지정 원호 대상 구역 바깥에서 맞은 사람도 피폭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지방법원 판결에 불복하고 나서 비판을 받고 있다.
히로시마지방법원은 국가가 지정한 원호 대상 지역이 아닌 곳에 있다가 피폭당한 84명이 2015~2018년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를 상대로 잇따라 제기한 피폭자 건강수첩 교부불허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지난달 29일 원고 전원 승소로 판결했다.
국가가 지정한 원호 구역 바깥에도 원자탄 폭발로 인한 검은 비가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에서였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일본 정부는 오히려 법원 판단에 과학적 근거가 결여돼 있다는 이유를 들어 12일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폭을 투하했다.
일본 정부는 원폭 투하 직후 히로시마기상대의 조사 자료 등을 근거로 1976년 검은 비가 쏟아진 것으로 추정되는 히로시마시 폭심지에서 북서쪽으로 길이 19㎞, 폭 11㎞의 타원형 지역을 '특례구역'으로 지정했다.
특례구역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무료 건강진단 혜택을 주고 특정 질환이 있는 경우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급해 다양한 원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1995년 피폭자 원호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특례구역 바깥의 히로시마 주민 일부가 '검은 비' 피해를 당했는데도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해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는 주민조사를 진행했다.
이어 조사결과를 근거로 기존 특례지역의 5배 규모인 히로시마시 거의 전역과 주변 지역을 특례구역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 짓고, 이를 중앙정부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급받지 못한 피폭자들은 결국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갔고, 마침내 지난달 29일 소송에 나섰던 원고 84명 전원이 승소 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피폭자 건강수첩 발급 업무를 담당해 이번 소송에서 피고가 된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는 1심 판결이 나온 뒤 곧바로 항소 포기 방침을 정하고 중앙정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베 정부는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정됐던 특례구역을 기준으로 시행한 정책을 뒤집을 과학적·합리적 근거가 없다며 항소토록 했다.
아베 총리는 항소 이유에 대해 "그간의 최고재판소(대법원) 판결과도 다르기 때문에 항소심 판단을 받아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다른 피폭지인 나가사키(長崎)에서 제기됐던 유사한 소송에서 특례지역 바깥에 있던 사람을 피폭자로 인정하지 않은 판결을 내린 적이 있는데, 아베 총리는 이를 근거로 법적 다툼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아베 정부는 다만 소송을 계속하면서도 정책적으로 원호 대상 지역을 확대하는 방안에 대해선 별도로 검토해 나가기로 했다.
이와 관련, 주무 부처인 후생노동성은 전문가를 포함하는 조직을 가동해 검은 비 피해 지역의 확대 방안 등을 모색할 방침이다.
그러나 변호인단과 일본 주요 언론은 아베 정부의 이 같은 방침을 비판하면서 80세 이상인 원고들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점을 들어 항소 절차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 소송 변호인단은 12일 히로시마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원고들이 원폭 영향으로 건강을 해친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며 아베 정부의 항소 결정은 고령인 검은 비 피해자들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카노 마사아키(高野正明) 원고단장(82)은 "정부가 사법부 판단에 트집을 잡고 있다. 우리 생명에도 한계가 있다"면서 아베 정부가 원호 대상 지역 확대를 검토키로 하면서 법정 다툼을 계속하기로 한 것에 분개했다.
마이니치신문은 13일 자 사설에서 "재판을 계속하겠다는 정부 판단은 피해자 구제를 뒷전으로 한 것이어서 매우 유감"이라며 항소 취하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검은 비의 영향은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기계적인 선 긋기가 아니라 피해 실태에 맞는 구제를 생각해야 한다"면서 "피해자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강조했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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