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길 메르켈, 코로나19로 부활…늑장대응 딛고 지지율 급등
대규모 확산 후 뒤늦은 등판…주정부들과의 협의 이끌어
지방선거 잇단 부진 및 후계자 당대표 사퇴로 위기상황서 반전
트럼프의 WHO 지원중단 선언 비판하며 존재감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오랜만에 예전의 위상을 되찾았다.
국내외적으로 입지가 계속 위축돼오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를 계기로 다시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다.
국내적으로 오랜만에 파열음 없이 전매특허였던 정치·행정 오케스트라의 정제된 화음을 만들어냈다.
국제적으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척점에 다시 서며 주목을 받고 있다.
바이러스가 확산하기 전까지만 해도 메르켈 총리는 2017년 9월 4연임에 성공한 이후 정치적으로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反)난민 정서 등을 활용한 극우 정당의 부상 속에서 메르켈 총리가 이끌어온 중도보수 성향의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은 지방선거와 유럽의회 선거 등에서 연이어 극도로 부진한 성적표를 얻었다.
메르켈 총리는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겸임해오던 2018년 10월 기민당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권력의 원심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후임 대표로 메르켈 총리가 사실상 후원해온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가 당선됐지만, 기민당의 누적된 난맥상 속에서 결국 올해 초 사임했다.
애초 이달 기민당 대표 선출이 이뤄질 예정이었고, 메르켈 총리의 숙적인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당권에 상당히 가까이 가 있었다.
메르츠가 기민당을 이끌 경우 메르켈 총리와 엇박자가 나게 돼 임기 후반이 상당히 위태로워질 우려가 나왔다.
이때만 해도 메르켈 총리의 중도 낙마에 대한 입장을 묻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올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코로나19 확산 사태 속에서도 메르켈 총리는 비판을 받았다. 지역사회 감염이 뚜렷하게 진행이 된 후 2주 동안 직접 나서지 않고 39세의 정치 유망주 옌스 슈판 보건장관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슈판 장관은 정부 합동 대응팀을 구성하고 전염 확산의 불가피성을 언급하며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미 대규모 확산이 이뤄진 이탈리아에 다녀온 시민들에 대한 감염 추적에 실패했다.
16개 연방주에 1천 명 이상의 행사 금지를 권고했지만, 대부분의 주 정부가 '콧방귀'를 뀐 점은 연방정부와 연방주들 간의 불협화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결국, 메르켈 총리는 지난달 11일에야 기자회견을 열어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처음으로 대국민 메시지를 남겼다. 이미 당시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는 2천 명을 넘어섰고 확산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자회견은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하기 몇시간 전에 이뤄졌다.
메르켈 총리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남겼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인구의 60∼70%가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될 것이라고 한다"고 언급해 주목을 받았다.
메르켈 총리의 발언과 WHO의 팬데믹 선언 직후 상황은 긴박해졌다. 사재기 열풍이 불었다. 경제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일부 언론은 갑자기 나타난 메르켈 총리의 강도 높은 발언에 대해 "약한 게 아니라 현실적"이라고 옹호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부글부글 끓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긴박한 상황임을 감안해 결과를 보고 평가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지역감염 확산 초기까지만 해도 독일 시민 상당수가 코로나19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했고, 상당수 언론 역시 지나친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다며 안이한 경향을 보였고, 무증상 전파의 무서움에 대해 경고음이 크지 않았다.
이후 메르켈 총리는 16개 연방주 총리들과 협의해 지난달 15일 국경폐쇄, 16일 공공 생활 제한 조처를 내렸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조치를 뒤쫓아가는 모양새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코로나19 확산 사태 초기 느리기만 했던 대응 태세와 비교하면 빨라졌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달 16일 기자회견에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면서 "새 조치는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없던 것으로, 보건 시스템이 마비되지 않으면서 환자 수와 중증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명분을 내세워 시민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는 같은 달 19일 대국민담화에서 "통일 이후, 아니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라면서 시민들이 연대해달라고 호소했다.
메르켈 총리는 역시 연방주 총리들과 협의해 지난달 23일부터 접촉제한 조처를 내렸다.
이후 메르켈 총리는 여러 차례 시민들에게 사회적 거리 유지 및 제한 조치 준수를 주문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독일 시민의 대부분은 위기감 속에서 이러한 강도 높은 공공생활 제한 조치에 찬성했다.
공공생활 제한 조치 이후에도 확산세는 가팔랐고 일일 신규 확진자 수가 6천명대로 치솟았지만, 이후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해 최근에는 2∼3천 명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슈판 보건장관은 지난 17일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확산에 대해 "이제 통제권"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 사태 이후 처음으로 통제되고 있다는 공식 언급이 나온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16일 기자회견에서 제한 조치가 부분적으로 성공했다면서도 "부서지기 쉽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과정에서 메르켈 총리와 집권당의 지지율은 꾸준히 올라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경제·사회적 위기 속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지도자를 중심으로 결집이 된 것이라고 현지 언론은 분석했다.
16일 공영방송 ARD의 여론조사 결과 기민·기사 연합의 지지율은 38%로 2주 전 같은 조사보다 3% 포인트 뛰어올랐다. 총선 직전인 2017년 8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대연정 소수파로 코로나19 경제 대응을 진두지휘하는 올라프 숄츠 장관이 소속된 사회민주당은 1% 포인트 오른 17%를 기록했다. 사민당은 중도진보 성향이다.
반면, 지난해부터 급격히 성장해온 녹색당은 19%로 3% 포인트 하락했다. 대안 정치세력보다 현실정치 세력에 힘을 실어준 셈이다.
극우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도 1%로 내려간 9%로 한 자릿수 지지율에 그쳤다. AfD는 지난해 한때 10%대 후반까지 지지율이 치솟았다.
이와 함께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 다시 맞서며 글로벌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다시 다지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 직후부터 추진한 미국 우선주의에 맞서 메르켈 총리는 다자주의의 가치로 맞섰으나, 국내 정치적으로 입지가 위축되면서 글로벌 무대에서도 위축됐다.
그 사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유럽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내게 됐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대응 부실과 중국 편향성을 들며 세계보건기구(WHO 자금 지원 중단을 선언하자, 강력하고 조율된 국제적 대응만이 팬데믹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WHO를 지지했다.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고 경제적 실탄도 아직 여유가 있다는 점도 유럽에서 메르켈의 대표성을 끌어올리고 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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