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APEC 팡파르 대신 최루탄·냄비 소리…시위 한 달 칠레
APEC 정상회의 열리기로 했던 날에도 격렬한 시위 이어져
최루탄·물대포에도 흔들림 없는 시위대…"개헌과정 지켜 봐야"
(산티아고=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거리는 한산했다. 객실이 20%밖에 차지 않았다는 시내 호텔에도 적막감이 흘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각국 정상들이 모이는 대규모 국제회의로 들뜬 부산함이 넘쳤을 곳이었다.
기자가 산티아고를 찾은 16일(현지시간)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개막하기로 한 날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중국, 일본 등 정상이 모두 찾기로 돼 있던 이번 회의는 개막 보름여를 앞두고 돌연 취소됐다.
시위 사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칠레 정부가 개최를 포기한 것이다.
APEC 개최 플래카드 등이 사라진 거리엔 극심한 불평등에 분노하고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문구가 가득했고, 화려한 팡파르 대신 시위대의 구호와 그들이 두드리는 냄비 소리, 경찰이 쏜 최루탄이 시위 현장을 뒤덮었다.
칠레 시위 사태는 어느새 한 달을 맞았다.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 인상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높은 공공요금과 사회 불평등 전반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대된 것이 지난달 18일이었다.
그 한 달 동안 칠레엔 많은 일이 있었다.
1973∼1990년 군부독재 이후 처음으로 비상사태 선포와 야간 통행금지가 등장하기도 했고, 시위대를 달래기 위한 임금과 연금 인상 조치 등도 나왔다.
혼란을 틈탄 방화와 약탈까지 겹치며 20명 넘게 숨졌는데 이중 5명은 진압과정에서 사망해 군경의 강경 진압에 대한 비난도 높아졌다.
칠레는 근 몇십 년간 볼 수 없었던 큰 위기를 맞았다.
국제회의 취소로까지 이어진 시위 사태에 정부는 마침내 개헌안을 들고 나왔고, 정치권이 15일 개헌 국민투표와 관련한 극적인 합의도 이뤄냈다.
한 달의 시위가 만들어낸 성과였다.
합의 다음날인 16일 주말까지 겹치면서 시위 규모는 전보다는 줄었고, 시위 관련 폭력 사건도 줄었다고 했다.
칠레 일간 엘메르쿠리오가 내무부를 인용해 전한 바에 따르면 15일 밤과 16일 사이 발생한 방화와 약탈 등은 모두 16건으로, 전날의 77건에 비해 크게 줄었다.
그러나 16일에도 시위 중심지인 산티아고 이탈리아 광장엔 수천 명의 시위대가 나왔다.
이들은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고 국기를 흔들며 피녜라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시민이 원하는 개헌을 위한 제헌의회 구성을 촉구했다. 칠레 국기 외에 마푸체 원주민을 상징하는 깃발이나 검게 물들인 국기 등 다양한 깃발이 등장했다.
아내와 함께 시위에 나온 마우리시오(40)는 "개헌 관련 합의는 큰 진전이라는 점을 부인하진 않는다"며 "그렇지만 여전히 남은 것이 많다. 개헌 절차도 복잡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계속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카밀라(20)는 "개헌도 중요하지만 시위대 요구 중 일부에 불과하다"며 교육, 의료보험, 연금 등 당장 고쳐야 할 시급한 문제가 더 많다고 강조했다.
전날 이탈리아 광장에서 시위하던 아벨 아쿠나(29)가 심장마비로 숨진 일도 이날 시위대를 다시 거리로 불러 모았다.
칠레 인권위원회와 시위대는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이 구조대원의 접근을 어렵게 해 사망을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앰뷸런스가 경찰이 쏜 최루탄, 물대포, 고무탄 등에 맞으면서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쿠나는 결국 병원에 도착한 직후 사망했다.
시위의 상징이 된 이탈리아 광장의 바케다노 동상에선 이날 밤 아쿠나를 추모하는 촛불 의식도 이뤄졌다.
경찰의 최루탄과 물대포는 이날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러나 한 달 동안의 시위로 '단련'된 이들은 고글과 복면으로 무장한 채 대오를 지켰다.
폭죽을 쏘고 발을 구르며 시위 구호로 가사를 바꾼 응원가를 목청껏 부르는 이들의 모습에선 오랜 시위에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능한 한 자주 시위에 나온다는 살바도르는 "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다. 이제 칠레는 깨어났다"고 했다.
긴 개헌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시위 규모는 줄어들 수 있지만 한 번 깨어난 칠레는 쉽게 잠들지 않을 듯하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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