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 '피' 나눈 흡혈박쥐 환경 바뀌어도 '우정' 유지
영장류에서나 관찰된 유대관계 야생 상태서도 확인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피만 먹고사는 흡혈박쥐는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다른 박쥐에게 '음식'을 나눠줄 줄 알며 이렇게 형성된 유대 관계는 물리적 환경이 바뀐 뒤에도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장류에서나 관찰돼온 협력이나 우정 등과 같은 사회적 관계가 흡혈박쥐 사이에서도 형성된다는 것이다.
과학저널 '셀(Cell)'을 발행하는 '셀프레스'와 외신 등에 따르면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의 시몬 리페르거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포획된 흡혈박쥐 사이에서 형성된 유대 관계가 야생에서도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 최신호에 발표했다.
흡혈박쥐는 말이나 소 등 동물의 피부에 면도날 같은 앞니로 작은 상처를 낸 뒤 이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핥아 먹는데 매일 밤 찻숟가락 한 개 분량의 피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흡혈박쥐는 이틀 밤 동안 굶으면 허약해지고 사흘째부터는 죽을 수도 있는데, 주변에 이렇게 아사 위기에 빠진 박쥐가 생기면 최근에 먹은 피를 게워내 먹이기도 하며 이 과정에서 유대관계가 형성된다고 한다.
암컷이 새끼를 위해 먹이를 나눠주곤 하지만 흡혈박쥐는 친족이 아닌 다 큰 성체 박쥐에게도 먹이를 나눠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지난 2010년부터 포획한 흡혈박쥐를 대상으로 실험실 관찰을 통해 이를 확인했으며, 이런 유대관계가 포획된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추가실험을 진행했다.
약 22개월간 실험실에서 관찰해온 암컷 흡혈박쥐 23마리의 등에 작은 센서를 달아 야생으로 돌려보낸 뒤 포획 상태에서 먹이를 나누고 털 손질 등을 해주면서 형성된 유대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지를 확인했다. 1페니 동전보다 가벼운 센서는 흡혈박쥐 등에 수술용 접착제로 부착됐으며 2초마다 어떤 박쥐가 누구와 같이 있는지에 관한 정보를 송신했다.
연구팀은 8일에 걸쳐 흡혈박쥐들의 상호관계를 추적 관찰했다.
그 결과, 실험실 환경에서 강한 유대관계를 보인 흡혈박쥐들이 야생 상태에서도 계속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며 이는 포획상태에서 형성된 관계가 갇혀있거나 선택폭이 줄어든 데 따른 부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됐다.
리페르거 박사는 "실험실의 흡혈박쥐 사이에서 관찰된 사회적 관계는 포획되기 전 서식지가 서로 달랐음에도 물리적,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매우 탄탄했다"면서 "흡혈박쥐를 야생으로 돌려보냈을 때 포획된 생활을 할 때 형성했던 파트너를 그대로 선택했다"고 밝혔다.
논문 공동저자인 오하이오주립대학의 제럴드 카터 조교수는 "이번 연구결과는 흡혈박쥐가 일부 영장류에서 보아온 우정과 비슷한 사회적 유대를 형성한다는 증거를 추가하는 것"이라면서 "동물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우정을 이해하는데 영감과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리페르거 박사 연구팀은 흡혈박쥐 개체간 협력관계에 편차가 나타나는 이유와 낮 동안의 협력 관계가 밤 사냥에서도 이어지는지에 대한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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