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 김미란 연출 "어린이는 무조건 착할까 궁금했죠"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어린이들은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존재일까. 이문열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초등학생부터 요즘 유튜브를 주름잡는 10세 유튜버 '띠예'까지, 이들은 나름의 주관과 취향이 있는 한 명의 인간이다.
최근 서울시 용산구 국립극장 소극장 판에서 초등학교 4·5·6학년 초기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신선한 연극 '영지'가 개막했다.
아동극도, 성장을 다루는 드라마도 아닌 이 이야기는 완전무결한 마을에 11세 소녀 영지가 전학 오며 출발한다. 아이들은 영화 '트루먼쇼'처럼 통제된 환경에서 인형처럼 산다. 영지는 마을의 마스코트 효정과 모범생 소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른들은 영지를 마녀라고 손가락질하고 위협한다. 영지는 두려워하지 않고 탈출해 "모두 환생!"이라고 외치며 모든 게임을 리셋한다.
김미란(36) 연출가는 지난 27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세상에 아예 어린이들과 중·고등학생 이야기는 많은데 초등학교 고학년의 이야기는 없더라"며 "이 친구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궁금증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지' 원작을 쓴 허선혜 작가님과 그런 대화를 나눴어요. 아이들이 꼭 착해야 할까요? 천사일까요? 저는 영지의 엉뚱함과 기발함을 칭찬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사실 학교 선생님 입장에선 그런 아이들이 얼마나 다루기 힘들겠어요. 어쩔 수 없이 조용히 하라고 하실 거예요. 다만, 저는 영지 같은 아이들에게 말할 공간을 주고 싶었어요."
김 연출은 자신이 어릴 적 지각·결석 한 번 해본 적 없는 모범생이었다고 했다. 부산대 경영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취직 대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한 게 사실상 유일한 일탈이었다. 그래서일까, 독특한 아이 영지를 이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날 공연에서 객석의 초등학생이 큰소리로 무대 위 배우들을 조롱한 것을 두고 김 연출은 상당히 당황스러워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한 초등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인형 만들기 수업 중인 6학년 반에 갔는데, 한 친구가 계속 비닐봉지를 던지며 돌아다니더군요. 선생님은 안절부절못하시고요. 그때 영지를 이해하는 데 큰 실마리를 찾았어요. 저 아이는 무슨 말이 간절히 하고 싶구나, 그런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구나…."
김 연출은 2013년 '간이연극: 그레고르 잠자'로 데뷔한 뒤 인물에 대한 섬세한 연출과 감각적인 무대를 보여줬다. 특히 2017년 청소년극 '좋아하고 있어'에서는 여고생들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해 호평받았다. 그는 당시 작업을 "10대 여성 청소년이 미디어에서 어떻게 소비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며 "일본 영화 속 순수하고 예쁘기만 한 모습이 아닌 살아있는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김 연출에게 앞으로 어떤 연출가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영국 연출가 토니 그레이엄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청소년들은 담배 피우던 불량청소년이 갑자기 전교 1등 하는 이야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성장이라는 게 게임처럼 툭툭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작은 변화를 알아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공연에서도 점을 찍어 정답을 제시하지 말고, 물음표를 남기는 연출을 하고 싶습니다."
여성이 주체가 되는 연극에 대한 희망도 밝혔다.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제 또래 여자 연출가가 많아요. 최근 4개 작품을 했는데 우연히 주인공이 다 여성이었고요. 개인적으로 기분 좋은 변화죠. 연극계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영지'는 6월 15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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