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50주년은 아내 덕분…지금도 '고도'를 기다린다"
명동예술극장·마포아트센터에서 기념 연극·전시회 열려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다양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이합집산하던 1948년. 남북에는 결국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섰다.
요지경으로 돌아가던 격동의 해는 한 소년에게 알 수 없는 열정을 불어넣었다. 중학교 개교기념일 연극 무대에 서며 한평생 연극과 사랑에 빠진 남자, 훗날 한국 연극의 거목이 되는 연출가 임영웅(83) 이야기다.
극단 산울림의 역사는 임 연출이 1969년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를 초연하며 시작됐다. 15년 후 극단 이름을 딴 산울림소극장이 만들어졌고, 어느덧 극단은 반백 살이 됐다. 26일 서울 마포구 산울림소극장에서 만난 임 연출은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며 미소지었다.
임 연출은 아내 오증자 서울여대 명예교수를 '연극 전우(戰友)'라고 불렀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롯해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드니즈 샬렘 작), '우리, 테오와 빈센트 반 고흐'(장 므노 작) 등 임 연출 작품 중에는 불문학자인 오 교수 번역으로 재탄생한 것이 많다.
"아내가 없었으면 산울림 소극장도 없었을 거고, 내가 지금까지 연극을 할 수도 없었겠죠. 아내는 나한테는 최고의 번역가이고 기획자이기도 했고, 나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연극을 생각해요. 연극판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거죠. 60년 가까이 평생을 함께 버텨줘서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는 현대극 방향을 바꾼 부조리극 고전으로 꼽힌다. 어느 한적한 시골,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서 있는 언덕 밑에서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두 방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이야기를 그린다.
임 연출은 1969년부터 매년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린 이유를 묻자 "그런 작품을 만난 건 연출자로서 큰 행운"이라고 했다.
"처음엔 사실 과감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니 책임감이 느껴졌어요. 특히 해외 공연을 할 때는 더 그랬죠. 한국의 '고도'를 보여줘야 하니까. 그래서 올릴 때마다 늘 긴장하면서도 또 기대되고, 그런 마음입니다."
대체 '고도'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고도'가 뭔지는 작가 베케트도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어요. 그걸 하나로 정해버리면 관객들의 공감도 제한될 수 있죠. 종교인들한테는 신(神)일 거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석방일 거고, 어렸을 때 가진 꿈일 수도 있고, 또 연극인들한테는 관객일 수도 있어요. 누구나 각자 의지하고 싶은 대상과 기다리는 고도가 있는 거고, 안 올 줄 알면서도 또 언젠가는 올 거라는 희망이 있는 거죠. 나한테도 '고도'는 늘 바뀌어요. 그래도 한결같이 기다리는 게 있다면 다른 아무 걱정 없이 원하는 연극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환경, 뭐 이런 게 아닌가 싶어요. 물론 아직 안 왔지만, 또 기다리는 거죠."
사회 부조리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 노(老)연출가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부조리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어 "내 연극이 그렇게 문제의식을 강조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사람 사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지 않나. 산울림 연극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술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시류를 따라가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임 연출은 인터뷰 사진을 촬영할 때 부축이 필요했다. 대부분 답변도 육성이 아닌 서면으로 대체해야 했다. 그럼에도 연극을 향한 열정은 여전했다.
그는 "물론 내 나이가 여든다섯이니까, 이젠 전처럼 현장에서 활동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가끔 극장에 내려가서 예전 자료들도 보고, 무대도 둘러보고 그런다"며 "힘들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배고픈 직업'이라는 연극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후배들에게 조언도 남겼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어려운 게 많을 거예요. 힘들 각오 없으면 할 수 없는 게 연극이지만, 또 무조건 견디라고만 할 수도 없잖아요. 정부랑 문화계에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해요. 서로 자기 사람들만 쓰려고 하지 말고 진짜 연극에 대한 애정과 안목이 있는 사람이 자리에 있어야죠. 힘들어도 연극은 분명 좋은 작업이니까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임 연출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는 5월 7∼25일까지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5월 9일부터 6월 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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