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배상청구권 소멸 안 돼" 판결, 한일 외교전 '도화선'되나
日 '배상 불가' 입장…판결 반영 韓 정부 입장 '주목'
한일관계 '근간' 시험대 올라…위안부 합의 갈등속 '설상가상'
(서울=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대법원이 기업들의 배상 책임을 최종적으로 인정하면서 향후 한일관계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과 한일기본조약에 기반을 둔 정치적 타결을 정면으로 뒤집는 취지 판결이 나오면서 한일관계의 '근간'이 50여 년 만에 새로운 시험대에 서게 됐다.
2015년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파기' 논란으로 갈등이 지속하는 가운데 이번 판결로 한일관계는 당분간 경색 국면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일제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라는 헌법적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일본기업이 피해자들에게 1억 원을 배상하라는 것이 요지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기업들이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 됐지만, 일단 일본은 그동안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문제가 '완전히·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해온 만큼 이를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정부는 오히려 강제집행 등의 조치가 취해질 경우 공식적인 분쟁 해결 절차에 돌입할 것으로 보이며, 일본기업들은 정부 방침에 따라 배상에 응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 경우 일본은 한국에 대한 외교 협상 신청을 거쳐 제3국 위원이 포함된 중재위원회나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절차를 진행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이뤄진 위안부 합의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파기' 논란이 나오는 상황에 일본은 한국이 다시 '약속'을 뒤집었다고 국제적 여론전을 펼칠 공산이 커 보인다.
일각에서는 지난 2016년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 때와 같이 주한일본대사의 일시 귀국이나 소환 등 외교적 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상호 대응 과정에서 한일 간 전면적인 외교전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이 29일 자국 언론 인터뷰에서 "패소를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청구권 이야기는 끝난 이야기"라고 주장한데서도 그런 기미가 엿보인다.
다만 대법원 판결 자체는 사실상 얼마간 예상됐던 부분인 만큼, 한국 정부의 후속 조치가 관건이라는 분석도 있다.
즉 사법부 판결과 별개로 한국 정부의 외교적 대응에 따라 갈등이 일정 수준 관리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날 "일본 정부는 원고(강제징용 피해자)가 승소하면 한일청구권 협정을 부인하는 듯한 대응은 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자세를 명확히 할 태세"라고 보도했다.
또 관련 일본기업들은 한국 내 자산을 대부분 철수시킨 상태라 압류할 만한 대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럴 경우 피해자 측은 제3국에서라도 강제집행 소송을 진행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우리 정부의 입장 정리 및 향후 조치가 한일관계의 향방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관련한 외교문서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민관합동위원회가 검토해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입장과는 다른 대법원 판결이 나온 만큼 우리 정부로서는 '불일치'를 해소하고 새로운 입장을 정립해 일본을 상대해야 하는 '난제'를 마주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향후 정부가 대법원판결 취지에 맞춰 정부 입장을 변경하고 그것에 따라 원칙적으로 대응할지, 판결은 그 자체로 존중하되 외교적 차원에서는 다른 중재적 방안을 마련할지 주목된다.
위안부 합의가 잘못된 합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도 한일관계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절충적' 입장 정리가 이뤄질지도 관심이 쏠린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이 사안은 과거 합의에 대한 해석과 향후 조치, 경제교류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다"며 "상황 관리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가 어떤 방안을 만들더라도 결국은 일본기업 측의 책임을 인정한 사법부 판결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해법이 간단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강경화 장관은 지난 2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사법부가 법과 절차에 따라 판단을 내려줄 것을 기대한다"며 "그 결과에 따라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며 정부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hapy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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