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유호 실종 20년]③"아들은 해군, 남편은 해적" 한탄
핵심 용의자 이동걸씨 통신감청·위치추적으로 검거
홍콩 근무 경찰 영사 조민오 치안관 정보보고 단서
(서울·부산·자카르타·싱가포르=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중국 공안이 산에이-1호로 둔갑된 텐유호를 1998년 12월 발견한 데 이어, 1999년 1월 하순에는 한국 해경 수사관들이 재외 공관을 거쳐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다.
텐유호에 실려 있다가 사라진 알루미늄괴가 처분됐으며 한국 출신 '이동걸'이라는 인물이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는 제보가 전달된 것이다.
이민법 위반으로 홍콩 현지 감옥에서 복역중이던 김태국(1954년생)이라는 한국인을 접견한 주(駐)홍콩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조민오 치안관(당시 경정·2006년 총경으로 퇴직)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보고였다.
◇ '송환 빅딜' 제의하면서 정보 제공
제보자 김태국씨는 중국 다롄(大連) 소재 마린스 차이나 대표로 있으면서 다롄과 홍콩에서 텐유호 선원 14명 전원을 모집한 송출업자였다.
김 씨는 1998년 6월 홍콩으로 와서 한국계 중국인 2명을 한국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시키려다 적발돼 이민법 위반죄로 징역 21개월을 선고받고 홍콩 텅타우(東頭)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김태국씨가 불법 여권 소지 혐의로 홍콩 당국에 체포된 시점이 텐유호 실종 이전이었기 때문에, 수사당국은 텐유호 사건과 관련해서는 김씨에 특별한 혐의점을 두지 않고 있었다.
다만 국제해사국(IMB) 해적신고센터의 노엘 충 지역담당관이 한국 해양경찰청 외사과에 김씨의 수감 사실을 알려 옴에 따라, 재외국민에 대한 영사 조력 차원에서 김씨를 면담하게 됐다는 게 조 전 치안관의 설명이다.
몇 차례 옥중 면담을 하다가 김태국씨는 조 전 치안관에게 의외의 제안을 내놓았다.
김씨는 "홍콩 교도소 생활이 너무나 힘들다"고 호소하면서, 한국으로 송환되도록 협조해 준다면 텐유호 실종 사건에 관한 정보를 주겠다고 말했다.
조 전 치안관은 당시 상황에 대해 "솔깃한 제의였지만 짐짓 딴청을 부리면서 '신뢰할만한 정보라는 판단이 들어야 홍콩 당국과 교섭할 수 있다'고 김씨에게 말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조 치안관은 'Dong Gul Lee'라는 용의자의 이름을 김씨로부터 받아낼 수 있었다.
경찰청은 조 치안관의 정보보고를 해양경찰청에 전달했고, 해경 형사들은 이렇게 표기될만한 이름을 지닌 40∼50대의 한국인 50여명을 컴퓨터 조회로 찾아낸 뒤 이 중 1947년생이며 부산에 사는 '이동걸'이라는 인물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씨는 텐유호 실종 2개월여 전인 1998년 7월 중순에 싱가포르로 출국했고 텐유호가 실종된 후인 10월 26일에 필리핀에서 귀국했다. 그는 그 후에도 홍콩, 싱가포르, 중국, 미얀마, 필리핀 등을 여러 차례 오가며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으며, 1999년 1월 27일 러시아로 출국한 상태였다.
이런 활동이 수상하다고 본 해경은 1월 30일 이씨에 대한 출국금지요청을 했으며, 31일에 이씨가 입국한 후 소재를 추적했다.
◇"아들은 해군, 남편은 해적" 한탄
해경은 이씨의 거소와 전화번호 연고자 등에 대한 조회를 통해 이씨가 부산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어 부산해경 통신실은 이동걸씨 집과 중국 다롄의 김태국씨 본가에 대해 통신제한조치 허가서(감청영장)를 받아 2월 5일부터 감청에 들어갔다.
당시 해양경찰청에서 형사반장으로 이 사건을 전담했던 김창권 전 울산해양경찰서장(1952년생·경무관으로 2011년 명예퇴임)은 감청을 통해 파악한 이동걸씨 부인의 한탄이 이씨 검거에 나선 결정적 단서가 됐다고 설명했다.
김 전 경무관은 "감청 중에 이씨의 부인이 친구에게 하소연하는 말에 솔깃했습니다. '아들은 해군인데 아버지는 해적이라니…. 영화 같은 인생이다'라고 하는 것을 듣고 텐유호 실종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본격적으로 검거작전에 돌입한 겁니다"라고 수사 당시 긴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이씨는 부산 본가에 나타나지 않고 공범으로 의심되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장소를 이동하며 은신했다. 갈아입을 옷도 몰래 본가와 통화해 외부에서 만나 전달받는 수법을 사용했고, 휴대전화기를 두 차례나 바꿔 가며 추적을 따돌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해경은 지속적인 감청으로 그가 쓰고 있던 휴대전화의 번호를 알아냈고 발신지 추적을 통해 그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 고속도로 추격전과 검문 끝에 검거
해경 형사들은 2월 9일 이씨의 하수인으로 활동중이었던 사람의 사무실이 있는 부산시 중앙동의 한 건물 앞에 이씨가 이용해 온 승용차가 주차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형사 9명이 자동차 3대에 나눠 타고 주변을 감시했다.
눈치 빠른 이씨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음을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승용차 운전을 맡긴 후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와 도주했다.
형사들은 휴대폰 위치확인을 통해 이씨가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이동중인 것을 파악해 이씨를 쫓아 나섰다.
이튿날인 10일 새벽 3시께 이씨의 휴대폰 전원이 꺼지는 바람에 고속도로 추격전을 통한 검거는 일단 실패로 돌아갔으나, 오후 1시께 다시 이씨의 위치가 확인됨에 따라 재추적이 개시됐다.
수사당국은 매표소와 검문소에 13명의 수사인력을 배치해 차량 검문검색을 한 끝에 이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해경 본청으로 압송된 이씨에 대한 신문은 해상폭력 사건 전문가인 해경청 수사과의 조철제 당시 경사(1955년생·경감으로 2013년 퇴직)가 맡았다.
해경은 이동걸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수인 이모(무역업체 로렐트란스 대표)씨와 김모(선박등록대행업자)씨가 텐유호의 선명과 국적 변경에 관여했고 증거인멸을 위해 선박도면을 소각한 사실과 이동걸씨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따라 김창권 형사반장은 2월 16일 형사들을 부산으로 보내 이 두 사람도 공범으로 긴급체포했다.
◇ 일부 혐의 확인…해적행위는 부인·함구
검거된 이동걸씨는 싱가포르의 무역회사 다야 테크놀로지(Daya Technology Pte Ltd·大亞科技有限公司)의 사장(general manager)이었다. 이 회사는 베니 반(Benny Ban)이라는 싱가포르인이 1990년대 중반에 설립한 것으로, 선박 매매와 선박 알선 업무를 주로 하는 업체였다. 베니 반이 소유주, 이씨는 이른바 '월급 사장'이었던 셈이다.
해경은 이씨를 심문한 끝에 이씨가 베니 반과 공모해 1998년 10월 11일께 텐유호에 실려 있던 알루미늄괴 3천6톤을 장물로 취득해 중국 기업에 매각한 혐의를 밝혀 냈다.
해경 수사 결과 텐유호는 실종 직후 미얀마 양곤항에 입항(1998년 10월 10일께)하기 전에 말라카해협 해상에서 이름이 '비토리아호'로 바뀐 것으로 드러났다.
이어 이 배는 말레이시아 파시구단항, 필리핀 푸에르토 프린세사항, 인도네시아 두마이항 등을 오가면서 '스칼렛'호, '하나'호에 이어 '산에이-1'호로 이름을 바꿨다.
텐유호의 배 이름과 국적을 4차례에 걸쳐 변경하는 이런 '선적 세탁'을 통해 이씨는 당시 가격으로 16억원 상당의 선박 소유권을 본인 명의로 이전해 불법으로 취득할 수 있었다.
이동걸씨의 하수인 3명 중 이모(1999년 당시 36세)씨와 김모(1999년 당시 39세) 씨는 텐유호의 국적 변경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이 배의 설계도면 13장을 소각하는 등 증거를 인멸한 혐의가, 수사기록에 '내연의 처'로 묘사된 최모(1999년 당시 41세)씨는 이씨가 필리핀에 입국할때 동행하면서 여권 위조와 장물 판매대금으로 받은 미화를 운반한 혐의가 각각 드러났다.
그러나 주범 격인 이동걸씨를 비롯한 피의자들은 해적행위 부분을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텐유호와 알루미늄 화물을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 또 텐유호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이씨 신문을 맡은 조철제 전 경감은 첫 대면부터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며 "이 씨는 무조건 '모르는 일', '나와 무관한 일'이라며 범행 관련 모든 것을 부인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주요 용의자 중 이씨가 검거됐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텐유호 선원들의 생사와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알루미늄괴가 장물로 넘겨진 사실은 밝혀졌지만, 실물이 어디 갔는지는 역시 묘연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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