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에 침몰된 나치 원폭개발 중수운반선 존재 확인
(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 2차대전 말기인 1944년 나치 독일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비장의 무기인 원자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나치는 이를 위해 점령지인 노르웨이의 한 수력발전소로부터 중수를 생산해 독일 내 원자로로 운반하려 했다.
이를 감지한 연합국은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지시로 특공대를 투입해 노르웨이 중수생산기지를 파괴하고 생산된 중수의 운반을 저지했다. 수도 오슬로로부터 약 100마일(약160KM) 떨어진 호수 복판에서 중수가 실린 운반선(페리)을 침몰시켰다.
가정이지만 만약 나치가 중수를 이용해 원자로를 가동하고 원자탄을 생산해 냈다면 런던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지 추측하기 힘들다.
2차대전의 명암을 가른 당시 연합군의 특공작전은 1960년대 커크 더글라스, 리처드 해리스 등이 주연한 '텔레마크요새의 영웅들'이라는 영화로 제작돼 알려진 바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탐사시리즈에 참여하고 있는 해양과학자들이 최근 첨단 다중 음파탐지 기술을 이용, 당시 침몰된 중수운반선을 찾아내 중수가 실제로 실렸음을 확인했다고 일간 텔레그래프가 1일 보도했다.
과학자들은 중수가 들어있었던 최소한 18개의 통을 발견했으며 더 많은 통이 호수 바닥 운반선 밑에 깔렸었다면서 이는 나치가 핵보유국이 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고 지적했다.
해군사학자인 에릭 그로브 전 샐퍼드대(大) 교수는 "나치의 핵폭탄 확보가 임박한 것으로 보였던 만큼 연합국들이 매우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면서 "중수는 나치의 원자로 가동에 핵심 요소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쟁 후 당시 독일 핵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은 중수의 손실이 '절대적으로 결정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원자로 프로그램이 중단됐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노르웨이는 1934년 중수 생산이 가능한 상업용 발전소를 처음으로 건설하는 데 성공했으며 독일은 1939년 4월 '우라늄 클럽'이라는 명칭의 핵 개발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이는 당시 미국의 핵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중수는 핵분열 속도를 조절하는 핵심 물질로 1940년 나치가 노르웨이를 침공했을 때 당시 중수 생산 발전소를 장악해 1942년경에는 매년 1톤(t) 이상의 중수를 생산해 냈다.
연합국 측은 히틀러가 중수를 핵폭탄 생산에 사용할 것을 우려, 여러 차례에 걸처 현지 노르웨이 특공대를 투입해 관련 시설 파괴작전을 벌였다. 이에 나치는 중수 보호를 위해 1944년 2월 생산된 중수를 선박과 열차를 통해 독일로 운반하려 했다.
그러나 처칠의 지시를 받은 노르웨이 특공대가 운반선에 시한폭탄을 설치해 운반선이 오슬로 북부 탄 호수 중심부에 이르렀을 때 폭발, 1천500피트(약450m) 깊이 호수 바닥으로 침몰했다. 중수를 다시 인양하기 불가능한 깊이였다.
그러나 당시 침몰한 운반선의 중수가 사전에 보통의 물로 교체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의문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번 탐사를 통해 170피트(약51m) 길이의 운반선이 아직 당시 모습 그대로 바닥에 묻혀있으며 시험결과 중수가 당시 통속에 들어있었던 것으로 입증됐다.
또 그 양도 독일이 핵보유국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과학자들은 밝혔다.
근래 히틀러가 2차 대전 말기 실제로 핵 개발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 논란이 일고 있으나 지난해 전문가들은 독일 브란덴부르크 근처 이전 연구시설에서 금속탐지 테스트를 통해 방사성 물질의 존재를 발견했다.
또 독일 시험비행조종사들은 설명되지 않은 버섯구름을 목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수운반선에 관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시리즈는 오는 6일 방영될 예정이다.
yj378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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