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즈카향나무는 향나무 일종…일본 특산종 아냐"
김종원 계명대 교수, '정신문화연구'에 논문 게재
"달성공원 향나무, 이토가 심은 나무라는 주장도 허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정부는 을미사변 120주년을 맞은 2015년 계룡산 중악단 앞에 있는 가이즈카향나무 2그루를 잘라냈다.
가이즈카향나무는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1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제국 황제 순종과 함께 기념식수를 한 뒤 일제가 곳곳에 심은 일본 특산종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일부 시민단체는 이러한 이야기를 근거로 달성공원과 국회 등에 남은 가이즈카향나무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김종원 계명대 교수와 계명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정아 씨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내는 학술지 '정신문화연구' 최신호에 게재한 '일제강점기의 가이즈카향나무 실체' 논문에서 가이즈카향나무에 관한 속설이 대부분 허구라고 밝혔다.
논문 제1저자인 김 교수는 먼저 가이즈카향나무의 어원과 특징을 살폈다. 일본에서 가이즈카향나무는 '가이즈카이부키'(貝塚伊吹)라고 하는데, 요코하마 인근 패총(貝塚) 유적지나 성씨에서 기인한 명칭으로 보인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가이즈카이부키는 북미와 유럽에 지점을 둔 요코하마 종묘상 목록에서 1928년 처음 등장한다"며 "이전까지 가이즈카이부키란 나무명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개화기에 일본에서 향나무가 조경수로 적극적으로 이용되면서 생겨난 상품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 한반도 식물 자원에 관한 숱한 기록물에는 가이즈카향나무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우리나라에서 가이즈카향나무가 조경수로 널리 알려진 시점은 1970년대 중반 이후"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생물학적 특징이라는 관점에서도 가이즈카향나무를 일본 특산종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그는 "향나무는 바늘잎(針葉)과 비늘잎(鱗葉)이라는 두 가지 모양 잎이 있는데, 가이즈카향나무는 바늘잎이 거의 없이 비늘잎으로 된 풍성한 불꽃 모양 개체를 골라내어 상품으로 삼은 것"이라며 "가이즈카향나무는 어떤 상품일 뿐, 본질적으로는 향나무 그 자체"라고 역설했다.
가이즈카향나무는 단순히 향나무의 일종이며, 향나무에 얽힌 역사는 일본보다 한국이 유구하다는 것이 김 교수 견해다.
그는 달성공원에 있는 가이즈카향나무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식수한 나무라는 주장의 허점도 분석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이즈카향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는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1930년 쓴 '대구이야기'(大邱物語)에 전한다. 그런데 당시 달성공원 경영과 미화를 맡은 미와 조테쓰(三輪如鐵)가 1911년 펴낸 '조선대구일반'(朝鮮大邱一班)에는 이 일화가 없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기념식수일이라는 1월 12일은 혹한기였는데, 뿌리가 상한 채 새로운 곳에 이식된 나무는 매서운 추위에 노출되면 필연적으로 고사한다"며 "설령 이토 히로부미가 나무를 심었더라도 1911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구이야기 원전에는 '당일 달성공원에 행차하여 폐하께서 친히 기념수를 심으시고 이토 공의 기념식수가 있었지만,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다'는 문장이 있는데도 번역서에는 빠졌다"며 "2000년대 이후 개인 블로그에서 잘못된 내용이 처음 소개된 뒤 마치 사실처럼 퍼졌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결론적으로 "현존하는 달성의 가이즈카향나무 노거수 두 그루는 순종과 이토 기념식수와는 어떤 관련성도 찾을 수 없다"며 "게다가 기념식수를 했다는 시기인 1909년에는 가이즈카향나무라는 식물이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사적 복원에 따른 노거수 제거와 이식에는 대상 식물에 대한 엄격한 생태사회학적 고증이 필요하다"며 "폐쇄적 배타주의 편승을 여과하는 것은 사적 복원에서 중차대한 과제"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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