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야, 생사를 함께하자꾸나"…사대부가 기록한 기물 예찬
한국고전번역원, '명(銘), 사물에 새긴 선비의 마음'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1241)에게는 유독 애착이 가는 벼루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시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된 '소연명'(小硯銘)이라는 글에서 "벼루야, 나는 너랑 함께 돌아갈 것이니/ 죽는 것도 사는 것도 함께하자꾸나"라고 고백했다.
이 벼루는 물이 고이는 웅덩이가 비록 한 치(3㎝)에 불과했지만, 이규보는 "너의 작음은 수치로 여길 것이 아니다"라며 "나의 무궁한 생각을 쏟아내게 한다"고 예찬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이 펴낸 신간 '명(銘), 사물에 새긴 선비의 마음'은 '소연명'처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선비들이 삶을 함께한 기물(器物)을 노래한 글인 명(銘) 60편을 모은 책이다.
'명'은 본래 '새기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물건에 대한 내력과 단상, 물건을 통해 얻은 각성을 기록한 글로 의미가 확대됐다.
사대부들이 명을 남긴 물건은 다양하다. 조선 중기 시인인 권필(1569∼1612)의 문집 '석주집'(石洲集)에는 "버려지면 돌/ 사용하면 그릇"이라는 짧은 글이 실렸다.
권필은 여종이 밭을 일구다 찾아낸 자그마한 돌솥을 모래로 문지르고 물로 씻은 뒤에 차와 약을 달이는 도구로 활용했다. 누군가가 쓰다가 버린 물건에 나름의 가치를 부여하고는 애용품으로 삼은 것이다.
18세기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1720∼1799)은 '붓'의 양면성에 주목했다. 그는 붓에 대해 "너를 잘 사용하면/ 천인성명과 같은 심원한 이치/ 모두 묘사할 수 있지"라면서도 "너를 잘 사용하지 못하면/ 충의와 사악, 흑과 백 같은 양극단/ 모두 뒤바뀌고도 남지"라고 적었다.
채제공은 붓으로 쓴 문서 때문에 붕당이 갈리고,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이 순식간에 뒤집히는 모습을 보면서 회의감과 피로를 느꼈던 듯싶다.
이외에도 선비들이 사물의 특성을 간결하게 표현하거나 사물을 향한 애틋함과 고마움을 표시한 글들이 실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으로 일했던 임자헌 씨가 글을 썼고, 정민주 씨가 그림을 그렸다. 252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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