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이 바란 유토피아는 상업국가 아닌 권력 없는 공동체"
강명관 교수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실학은 사족 중심 체제를 뒤집으려는 개혁사상이 아니라 성리학에 기반을 둔 자기조정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해 온 강명관 부산대 교수가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의 '허생전'을 새롭게 분석한 책을 펴냈다.
허생전은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수록된 '옥갑야화'(玉匣夜話)의 일부다. 옥갑야화에는 모두 7편의 글이 실렸는데, 마지막에 있는 허생전의 분량이 가장 많다.
허생전의 내용은 익히 알려졌다. 집에서 책만 읽던 허생은 한양 최고의 부자인 변씨에게 1만 냥을 빌려 과일과 말총을 사재기해 재산을 크게 불린 뒤 무인도를 사서 도둑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다. 이후 변씨에게 갚을 돈을 제외한 재물을 바다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이완 장군을 만나자 북벌을 위한 세 가지 방법을 일러준다. 그러나 이 계책이 실현되지 않자 다시 홀연히 떠난다.
종래에는 허생이 벌인 활동에 주목해 연암이 상업과 무역을 지지했고, 기존의 무능한 양반 세력을 비판적으로 인식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일부 학자는 허생전에서 자본주의적 근대, 내재적 발전론의 실마리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신간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에서 저자는 이 같은 시각을 모두 부정한다. 무엇보다 연암이 상업과 무역을 장려하고자 했다는 주장은 근대적 독법에 따른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연암이 상업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허생전 곳곳에서 확인된다. 허생은 막대한 부를 쌓은 뒤 다시 투자하지 않고 섬으로 들어간다. 또 돈을 바다에 버리고 선박을 의도적으로 폐기하는 무모한 행동도 저지른다.
아울러 저자는 옥갑야화에서 허생전 앞에 실린 6편의 이야기를 보라고 강조한다. 이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생명, 윤리, 공적 이익, 인간관계다. 연암은 오히려 화폐로 인한 경제 변화가 사회에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저자는 "연암은 상업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이익의 추구가 인간의 윤리에 선행할 수 없고, 이익 추구는 당연히 윤리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역설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연암이 바란 세상은 근대적 상업국가가 아니라고 단정한다. 연암이 꿈꾼 유토피아는 허생전에 등장하는 무인도처럼 국가와 양반에게 착취당하지 않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소농 공동체였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연암은 실학자들이 내놓은 개혁안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깊이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허생의 섬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작용하지 않는 급진적 공간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어 "연암이 허생의 섬에서 구현한 아나키즘은 근거 없는 상상력의 결과물이 아니다"라며 "연암은 민중의 희망을 폭넓게 반영해 허생의 섬에 구현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휴머니스트. 424쪽. 2만원.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