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구석구석 스민 빛과 소리…덕수궁 찾아든 현대미술
'빛·소리·풍경' 展 9월 1일 개막…양방언·정연두·권민호 등 전시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수양산의 고사리를 꺾어 위수빈의 고기를 낚아 / 의적의 빚은 술 이태애백 밝은 달이 / 등왕각 높은 집에 장건이 승상허고…"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마당에 '수양산가'가 흐른다. 고종이 기생 석경월을 시켜 궁궐에서 처음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곡이다. 흰옷을 입은 무용수가 구슬픈 곡조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어룽어룽하다. 영상이 끝나고 VR(가상현실) 안경을 벗자, 함녕전 행각의 창호 문이 눈에 들어왔다.
행각에 들어가 감상할 수 있는 이 영상은 오재우(34) 작가의 '몽중몽'이다.
오 작가는 온통 현대식 건물들에 둘러싸인 덕수궁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고종의 원대한 꿈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그중에서도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행각의 "비어 있음"이 전통을 주제로 한 작업에 몰두해온 작가를 끌어당겼다.
"함녕전 행각의 모습이 현재 우리가 전통을 대하는 방식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정작 잘 알지 못하는, 그런 단절된 상황요."
'몽중몽'은 고종을 비롯해 함녕전을 오갔던 사람들의 꿈을 담은 작품이자, 전통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함녕전을 비롯해 덕수궁 곳곳에서 9월 1일부터 현대미술 전시 '빛·소리·풍경'이 열린다. 강애란과 권민호, 김진희, 양방언, 오재우, 이진준, 임수식, 장민승, 정연두 등 한국 작가 9명이 대한제국 시기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31일 언론에 먼저 공개된 덕수궁은 구석구석 빛과 소리가 스며들면서 피가 돌고 생기가 넘쳐 흐르는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단청이 없는 건물인 석어당에 설치된 권민호(38) 작가의 건축 드로잉은 석어당 골조를 바탕으로, 한국 산업화의 상징들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식민지 경성을 누볐던 증기기관차인 모갈 1호와 KTX가 함께 달리고, 일본식 적산가옥과 세운상가, 주공아파트,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이 함께 늘어선 풍경이 이채롭다. 석어당을 떠받치는 것은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한강 교량들이다.
덕수궁에 들어서는 관람객들을 가장 먼저 맞는 '온돌야화'는 20세기 초 일본인이 촬영한 사진에서 우리 조상의 일상만 도려내 재구성한 장민승 작가의 이미지와 양방언의 음악이 어울린 작품이다.
고종이 서재에 어떤 책을 뒀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강애란 작가의 서고 작업 '대한제국의 빛나는 날들', 고종과 덕혜옹주를 바라보는 시각을 네 점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정연두의 '프리즘 효과' 등 보물찾기하듯이 볼만한 작품이 많다.
이번 행사는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과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가 함께 준비했다.
전시는 11월 26일까지. 문의 ☎ 02-3701-9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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