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르완다국립농축산대 유일 한국인 교수 최남희 박사
시니어 해외봉사 적극 권장…"능력발휘·건강유지·제2인생 일거삼득"
(키갈리<르완다>=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본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며, 제2의 인생도 즐길 수 있습니다."
르완다국립종합대학(UR) 농축산대학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인 최남희(71) 박사는 현지시간으로 1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년퇴직한 시니어들에게 "60평생 살아온 한국보다는 다소 불편하겠지만 개발도상국에 나와 봉사하는 것은 이처럼 일거삼득"이라며 해외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최 교수는 지난 2007년 12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시니어 봉사단원으로 르완다 땅을 처음 밟았다. 2년 동안 농축산대 수의과에서 제약 관련 강의를 했고 '식품과학기술과'를 개설하는 데 역할을 했다.
르완다 북쪽 무산제에 있는 농축산대에는 작물과, 토양과, 식품과학기술과, 동물과, 수의과, 임학과, 원예과 등 8개 전공학과가 있고, 120여 명의 교수가 2천여 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폴 카가메 대통령의 농업개발 우선시 정책에 따라 가장 인기 있는 대학으로 명성이 높다. 르완다의 '서울대 농대' 정도로 보면 된다고 최 교수는 설명했다.
KOICA 봉사단원 임무가 끝날 무렵 농축산대 총장과 이 나라의 친한파인 한 상원의원의 만류로 대학에 남은 최 교수는 2년 6개월 동안 근무한 뒤 KOICA 중장기 자문단원으로 대학 강단에 섰다. 그리고 다시 대학으로부터 더 있어달라는 제의를 받고 10년째 근무한다.
"KOICA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왔어요. 7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죠. 대부분 정부 농축산부나 르완다표준협회(한국의 식약청에 해당), 식품 분야 기업 등에 취직했습니다. 이 나라의 동량(棟樑)으로 활약하고 있답니다."
최 교수는 아내와 큰아들 재석 씨도 르완다에 불러들였다. 르완다의 발전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아들은 현재 UR 의과대학에 재학하고 있다. 3명의 한국인 의대생 중 한명이다. 최 교수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이 나라에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아들도 아버지의 뜻을 존중한다고 한다. '봉사 DNA'의 부전자전이다.
최 교수는 평생 제약과 교수의 길을 걸었다. 전북 김제 출신인 그는 고려대 농대를 졸업하고 종근당에 입사해 33년간 근무하고 정년퇴직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미국 켄사스주립대에서 연수를 하고, 고려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틈틈이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난 2006년 정년퇴직한 그는 자영업을 하는 아내의 일을 돕다가 KOICA 시니어 봉사단에 응모해 합격했다.
"퇴직하고 나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상실감이 컸죠. 그런데 어느 순간 '봉사' 그 자체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선진국, 잘사는 사람들의 아픔만을 보살핀 것 같아 어려운 나라를 위해 일해보고 싶었죠. 어쨌든 KOICA, 대한민국 덕분에 여기에서 즐겁게 일하며 살고 있죠. 감사할 따름입니다."
10년 전과 비교할 때 르완다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발전을 했다고 그는 강조한다. 키갈리 시내에는 빌딩도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17층짜리를 비롯해 즐비하게 들어섰고, 1%에 불과하던 도로 포장률도 지금은 40%를 넘겼다.
그는 대학에 근무하면서 이 나라를 '아프리카의 제약 허브'로 만들기 위해 정부 부처를 열심히 뛰어다녔다. 예산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일을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서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카가메 대통령은 한국을 발전 모델로 삼고 함께 일하고 싶어 합니다. KT가 이곳에 4G망을 깔았듯이 말이죠. 인도는 컴퓨터 수리 및 판매를 하는데, 한국은 기술로 경쟁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큰 욕심 안 부리고 5∼10년을 내다보면 자리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스마트 팜, 즉 참외, 수박, 토마토 등을 컴퓨터를 이용해 온실에서 키우고 이를 판매한다면 대박을 칠 수 있을 겁니다."
비료사업도 추천했다. 자신이 5년 전 대학 총장과 함께 추진하다가 투자 유치를 못 해 그만 둔 업종이다. 그는 르완다에서 비료사업만큼은 투자 대비 소득이 상상외로 클 것이라고 진단한다.
건축분야는 쉬운 것 같아도 의외로 까다롭다고 조언했다. 1970∼1980년대 한국에서 실력보다는 로비가 더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보탰다. 다만 현지인과 동업을 한다면 이 분야도 승산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10년을 거주한 르완다를 떠날 생각도 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계속 남아달라고 요청하지만 이제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가 된 것 같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강단을 떠나 제약 관련 사업을 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초기 자금이 없으니 아예 아시아의 개도국으로 가서 봉사할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ghw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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