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도서를 폐지로 팔아야 합니다"…40년 운영 헌책방 폐업
광주 동구 헌책방거리 한때 60여 곳 성업, 현재 7곳만 남아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앗! 조선왕조실록은 버리면 안 됩니다.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지난달 25일 오전 광주 동구 광주고 인근 헌책방거리의 한 책방 앞.
한 전직 교수가 화물차 짐칸으로 던져지는 책더미를 뒤져 조선왕조실록, 씨알의 소리 등 오래된 책들의 영인본(影印本)을 품에 안았다.
비록 원본 고서는 아니지만 영인본도 구경조차 하기 힘든 희귀도서들이 고물상에 폐지로 팔려나가기 직전 가까스로 되살아난 순간이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헌책방에서 그날 책방 주인과 고물상 인부들은 먼지가 쌓인 책을 화물차에 던져 가게를 정리했다.
이 책방 주인은 1976년께부터 이 주변에서 헌책방을 운영해왔다.
광주의 헌책방 거리로 불리는 동구 광주고 앞에 자리 잡은 것은 1981년 2월부터다.
무려 40년동안 운영하던 헌책방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단골들의 안타까운 문의가 쇄도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이 헌책방을 드나들어 참고서를 사고, 서울로 대학 간 뒤에도 고향에 오면 이곳을 들리곤 했다는 이무성(58) 전 광주대 교수도 그들 중 한 명.
이 전 교수는 아까운 책을 한 권이라도 살리고 싶으니, 하루만 폐업일을 미뤄달라고 주인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고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은 절판돼 구할 수 없는 책들을 이 전 교수는 하나하나 골라 챙기면서 헌책방 폐업을 안타까워했다.
헌책방의 책장에서 수십 년 동안 잠자던 책들은 폐업 뒤 1t 트럭 3대 분량의 폐지로 고물상에 팔렸다.
뒤늦게 헌책방을 찾은 다른 단골들은 책을 사들인 고물상을 찾아 산더미처럼 쌓인 책더미 속에서 출판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보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광주 동구 계림동에서 광주고 앞으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70~80년대 약 60∼70개의 헌책방과 서점이 성업하던 대표적인 책방거리였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해 이제 7곳만 남았다.
헌책방들은 그동안 건물 임대료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극심한 운영난에 허덕였다.
살아남은 책방들도 수익을 냈다기보다 헌책방 주인이 건물주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임대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돈벌이는 되지 않지만, 노령에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책방 주인들 덕분에 헌책방거리의 명맥이 유지됐지만, 숫자는 갈수록 줄었다.
종교 서적이나 절판된 인문학 서적을 구하기 위해 이곳을 드나들던 이 전 교수는 헌책방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을 보고 대책을 마련하려고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헌책방 운영자 대부분이 고령의 노인들로 책방을 이어줄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지병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돈을 벌지 못하는 고질적인 운영난에 후계자 찾기에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번에 문 닫은 이 헌책방도 학습지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책방이었으나, 이제 그 자리에 정수기 대리점이 들어선다.
헌책방 주인 A씨는 "사람들이 찾지 않고, 몸도 예전 같지 않아 더는 책방을 운영할 수 없다"며 손 떼 묻은 헌책을 트럭 위로 던지며 손사래를 쳤다.
이 전 교수는 "운영난을 겪거나 후계자를 찾지 못한 책방을 돕기 위해 책방 주인들이 함께 협동조합을 구성하는 방안 등을 제안했지만, 역부족이었다"며 "문화와 예술의 도시 광주에서 역사를 자랑하는 헌책방거리가 아예 자취를 감출까 봐 걱정이다"고 말했다.
pch8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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