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도 실리도 잃은 생보3사 자살보험금 지급…소비자는 '뒷전'(종합)
버티던 3사, 거업활동 차질에 CEO까지 위태로워지자 지급 결정
앞서 전액 지급 결정한 보험사만큼 제재 수위 못 낮출 듯
"대형보험사가 내 보험금 잘 챙겨줄 것"이라는 신뢰도 낮아져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생명보험 '빅3'가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도 지급하기로 했지만, 이 과정에서 회사 영업에 심각한 차질 우려되고 최고경영자(CEO)가 위기에 몰리고서야 막판 뒤집기를 시도하는 등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약관을 통한 소비자와의 약속은 뒷전으로 밀렸다.
2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한화생명[088350]은 오는 3일 열리는 정기 이사회에 자살보험금 전액 지급 안건을 상정할 예정이다.
한화생명까지 이사회에서 자살보험금 지급을 결정하면 17개 보험사가 모두 자살보험금을 지급하게 된다.
버티던 보험사들이 결국 약관을 통해 소비자에게 약속한 보험금을 지급하게 됐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문제는 보험사들이 약관에 자살에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주겠다고 명시해두고는 일반사망보험금을 준 데서 시작됐다. 통상 교통사고나 재해로 숨졌을 때 받는 재해사망보험금은 일반사망보험금의 2배 이상이다.
물론 자살을 재해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살이 재해든 아니든 보험사들이 약관에 그렇게 써 뒀고, 이런 보험상품을 2001년부터 2010년 표준약관 개정 전까지 9년이나 팔았다.
이를 발견한 고객이 문제를 제기하자 보험사들은 "과거 약관은 실수로 만들어졌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자살한 사람에게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하면 자살을 부추길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결국 금감원이 2014년 대대적인 현장검사를 벌인 뒤 제재를 통보하자 보험사들은 법적 판단이 필요하다며 소송을제기하고 보험금 지급을 미뤘다.
소송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소비자들의 보험금 청구 소멸시효 2년은 하나둘씩 지나갔다.
지난해 5월 대법원이 약관대로 자살에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을 때 자살보험금 문제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기회가 있었다. 이때 일부 보험사들이 전액 지급을 결정했다.
같은 해 11월엔 소멸시효가 지난 경우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을 근거로 버티는 보험사들에 금감원이 "약관에 적어놓은 약속을 지키라"고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자 나머지 생보사들도 떠밀리듯 보험금 지급에 나섰다.
그러나 대형 3사만은 예외였다. '자살은 재해가 아니다', '대법원의 판결에 반해 자살보험금을 지급할 경우 배임 소지가 있다'는 명분을 들어 꿈쩍하지 않았다.
배임 문제가 있다던 생보사들은 금감원이 최고 수위가 CEO 해임권고, 보험업 인허가 취소에 이르는 중징계를 예고하자 그제야 부랴부랴 보험금 '일부' 지급 방안을 내놨다.
약관을 지키지 않은 보험사들을 제재할 법적 근거가 생긴 2011년 1월 24일 이후 발생한 건부터 자살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제재를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형평성 논란도 제기됐다. 보험사의 잘못으로 발생한 일인데, 누구는 보험금을 못 받고 누구는 받을 수 있게 돼서다. 2011년 1월 24일 보험금 청구자와 1월 23일 청구자는 하루 차이로 보험금 수령 여부가 갈린다.
소비자들의 원성이 높아만 졌지만 결국 전액 또는 전건 지급 결정으로 생보사들을 움직인 것은 '소비자'보다는 회사의 손실과 'CEO 리스크'였다.
교보생명은 오너 CEO인 신창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금감원 제재 결정 직전 미지급 자살보험금 전건 지급을 결정했다.
CEO가 문책경고 이상을 받으면 연임은 물론 3년간 다른 금융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할 수 없다.
삼성생명은 CEO 문책경고로 김창수 사장의 연임이 불투명하게 되자 이날 이사회를 열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 1천740억원 전액 지급을 결정했다.
삼성그룹의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생명이 중심이 되는 '삼두마차'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커진 만큼, 삼성생명 대표이사 자리의 중요성이 커졌다.
게다가 일부 영업 정지 제재가 확정되면 삼성생명은 3년간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수 없게 된다. 삼성생명은 그간 금융지주사 전환 시도를 해왔는데, 지주사 전환 자체가 신사업으로 분류되는 데다 건건이 금융당국의 인가를 받아야 해 기관 제재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일부 영업 정지 2∼3개월간 영업을 하지 못하는 설계사들이 다른 회사로 적을 옮기거나 그만두면 영업조직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생보사의 위기감도 큰 상황이다.
뒤늦게라도 전액 지급을 결정해 삼성생명과 한화생명의 최종 제재 수위는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먼저 자살보험금 지급을 결정한 보험사가 과징금 부과 처분만 받은 데 비해 시간을 끈 대형 3사의 영업 일부 정지는 불가피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3사 중 가장 먼저 지급 결정을 밝힌 교보생명도 영업 일부 정지 처분은 피하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삼성·교보·한화생명은 '대형보험사가 소규모 보험사보다는 안정적이고 내 보험금을 잘 챙겨줄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신뢰도 일정 부분 잃게 됐다.
chopar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