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정부가 중대재해를 선진국 수준으로 줄이겠다며, 규제보다 기업의 자율 예방에 무게를 두고 정책기조를 완전 바꿨지만, 노동계도 경영계도 모두 실효성 논란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 세종주재기자 연결해 들어보겠습니다.
전 기자,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달리 노사간 대립이 심하고 안전의식도 낮아 자기규율 예방체계가 제대로 정착될 수 있는지 의문인데, 정부가 선진국형 자율적 산업 안전체계로 정책 방향을 바꾼 배경은 무엇인가요.
<기자>
이번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은 1972년 처음으로 `자율규제` 개념을 제안한 영국의 `로벤스 보고서`를 참고로 했는데요.
1970년 전후로 영국의 산재 사망자는 우리보다 100명 정도 많았는데, `자기규율` 예방체계로 바꾼 시점이 이때였습니다. 정부는 현재 사망자 건수도 비슷하고, 노사당사자가 산업안전보건에 소홀한 상황까지 비슷해 지금이야말로 체계를 바꿀 적기라고 본 겁니다.
또 우리나라는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이 만들어진 이후 처벌에만 치중하다 보니 많은 기업들이 안전 역량을 키우기 보다는 당장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법무 컨설팅이나 서류 작업에만 더 많은 관심을 쏟는 것이 현실이었고요.
근로자 역시 스스로를 `보호 대상`으로 인식해 산재 예방에 주체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여야, 그리고 노사간에 "중대재해를 줄이는 데 예방이 더 효과적"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기에 실효성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출발 자체가 다른 거죠.
정부가 제시한 자율규제는 `위험성 평가`가 의무화된다는 게 핵심인데요. 이 위험성 평가는 노사가 위험 요인을 스스로 찾아 개선대책을 마련하는 건데 이미 2013년 제도가 도입됐지만 대기업에선 일방적으로 진행되기 일쑤였고, 중소기업에선 복잡하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노사관계 대립이 심한 대기업 사업장의 경우, 또 인력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 역시 노사가 함께 산재 예방을 위해 뜻을 모은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쉽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앵커>
이번 로드맵을 보면 2013년 도입한 위험성평가 활용도를 높이겠다만 당장 내년부터 대기업 위험성평가가 의무화되는데요. 기업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 같은데요.
<기자>
네, 맞습니다. 경영계는 처벌 위주에서 자율과 예방으로 바꾼다는 정부의 정책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위험성 평가`를 의무화한 것은 `중복 규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CEO 과잉처벌 문제에 대한 개선 방향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는데, 여기에 위험성 평가를 지키지 않으면 벌칙을 주는 새로운 처벌 규정까지 생겼다고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또 `처벌`에만 초점을 맞춘 것 아니냐는 거죠.
독일, 일본 등 선진국의 경우만 봐도 위험성 평가를 해야 하지만, 벌칙규정이 없고 대부분 자율관리제도로 운영하고 있고요.
물론 정부는 위험성 평가를 충실히 이행할 경우, 근로자가 죽거나 크게 다치는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이를 선처해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재해가 발생하거나 다수가 사망한 경우엔 반드시 형사처벌을 받도록 하고, 또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산재보험료가 할증되는 등 사업주를 처벌하거나 제재를 강화하는 내용이 별도로 추가된 데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부는 또 이번에 근로자 참여 중심 기구인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의무설치 대상을 100인 이상에서 30인 이상으로 확대했는데요. 중소기업계는 그렇잖아도 경기침체 국면에 자금과 인력난에 시달리는 영세 중소기업들의 행정 부담만 더욱 가중시킬 수 있다며 재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앵커>
경영계도 불만이군요. 그런데 노동계는 애초부터 `예방` 위주의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반대했다지요?
<기자>
네 그렇습니다. 노동계는 최근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등의 처벌 강화에도 8년째 사고사망만인율이 정체되고 있기 때문에 `예방` 중심의 산재예방 체계로 바꿔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입장인데요.
2020년 1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에 따라 강화된 처벌이 반영된 양형기준은 2021년 7월부터 적용됐는데, 산안법 위반사건에 대한 재판이 평균적으로 3~5년 정도가 걸린다는 점에서 처벌 강화로 인한 효과성을 따진다는 건 시기상조라는 겁니다.
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에도 사망사고가 줄지 않는 것은 법의 모호한 책임 규정에 따른 처벌 사각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며 오히려 `법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노동계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아울러 현장에선 아직 안전보건과 관련한 근로자의 권한이나 역할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만큼, 근로자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는 방안 마련도 촉구했습니다.
<앵커>
결국, 중대재해에 관한 `처벌` 규정을 담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이 어떠한 방향으로 개정되느냐가, 관건이겠네요. 당초 로드맵보다 먼저 시행령 개정안 내용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지만 늦어지고 있네요.
<기자>
경영계가 요구한 경영책임자 처벌 범위 조정은 이번 로드맵에 포함되지 않았는데요.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해선, 상습·반복, 다수 사망사고 등에 대한 형사 처벌 요건을 명확히 하고, 기업 자율의 위험성평가 등을 통해 사고예방의 실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고용노동부는 내년 상반기에 노사정이 추천한 전문가로 구성된 `산업안전보건 법령 개선 TF`를 운영해 중대재해처벌법 정비안을 마련할 방침입니다.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을 놓고 여전히 노동계와 경영계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어 국회 논의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됩니다.
야당과 노동계는 법이 제대로 안착되기도 전에 사실상 경영자 처벌 규정을 완화하려는 시도라며 반발하며 5인 미만 사업장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반면,
경영계는 CEO 이외에 안전보건최고책임자도 경영책임자로 봐야 하고 위반 시 처벌이 징역형보다는 벌금이나 과징금 같은 `경제벌`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앵커>
당초 예고보다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발표는 한달 정도 더 늦어졌음에도 경영계도, 노동계도 모두 불만인 대책이 되고 말았네요. 앞으로 후속조치 논의가 더 중요할 듯 싶은데요.
<기자>
네, 그렇습니다. 전문가들은 로드맵 이행을 위한 후속 조치 논의 과정에서 산업계와 노동계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절충점을 찾아야 예방 체계가 제대로 정착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 이번 로드맵엔 위험성 평가를 위한 예산이나 인력 확보 등 산업현장 인프라 구축을 위한 지원과 감독관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대책들은 빠졌다는 지적도 나오는데요. "기업을 믿는다"는 점 외에 다른 보완책이 제시되지 않아 실효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인거죠.
정부가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안을 마련해 입법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정부세종청사에서 전해드렸습니다.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