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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읽어주는 여자] 1편. 명품과 짝퉁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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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품 시장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하는 브랜드는 누구나 아는 루이비통이다. 루이비통 고유의 LV 로고는 오랫동안 ‘나는 명품이다’를 상징해왔고, 20~30대 여성 중에 루이비통 가방 한 개쯤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품의 대명사로 통한다. 루이비통의 베스트셀러인 스피디 백은 ‘한국 길거리를 걷다 보면 3초에 한 번꼴로 볼 수 있는 가방’이라는 뜻의 ‘3초 백’으로 불릴 정도다.


그런데 요즘 진짜 패션 피플들은 로고가 잔뜩 박힌 제품을 선호하지 않는다. 루이비통, 구찌 등 로고가 주를 이루는 가방을 내놨던 브랜드들도 로고는 최소화하되 독창적인 디자인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루이비통은 가죽 본연의 결을 살린 에피 라인을, 구찌는 대나무 손잡이를 단 뱀부 백을 대표 제품으로 밀고 있다.

이들이 로고가 잔뜩 박힌 가방보다 비싼 것은 물론이다. 더 좋은 가죽을 쓰고 더 손이 가는 공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고가의 제품을 대표 상품으로 내세우는 건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업그레이드하면서 매출까지 끌어올리려는 일석이조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2013년 국내 명품 업계에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단순히 ‘짝퉁’이라 부르는 가짜 명품이 팔리고 그런 업자들이 단속되고 하는 식의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명품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꼽히는 에르메스의 대표 가방인 버킨과 켈리 핸드백을 똑같은 가죽에 같은 급의 품질로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만타 백이 히트를 친 사건이다.

사만타 백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탈리아의 사만타라는 가죽 제조 회사가 가공·염색한 가죽으로 만든 핸드백이다. 그런데 이 사만타사로부터 국내 개인 사업자나 공장 운영자들이 가죽을 사와서 버킨, 켈리 핸드백의 디자인과 똑같이 만들어 사만타 백이라 이름 붙여 판매한 것이다.

물론 에르메스라는 로고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지적 재산권에 걸리는 일은 아니다. 만약 에르메스코리아에서 이를 문제 삼아 ‘디자인도 상표’라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건다면 오랜 기간이 걸려 그렇다고 결론이 날 수도 있겠지만, 명품 브랜드들은 이런 일 자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차피 에르메스 제품을 구입하는 소비자와 사만타 백을 구입하는 소비자가 다르다는 판단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사만타 백의 인기는 입소문을 타고 무섭게 퍼져 나갔다.

최고급으로 꼽히는 에르메스급 가죽을 고품질의 염색 기법으로 색상까지 곱게 냈는데도 사만타 백의 가격은 40만~60만 원대 수준이기 때문이다. 버킨, 켈리 백이 1,000만~2,000만 원대인 것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이다. 이 때문에 한편에선 ‘에르메스 버킨, 켈리 핸드백과 같은 디자인의 제품을 거품 뺀 가격으로 구입하는 합리적 소비’로 인식하는 분위기까지 생겼다. 무엇하러 1,000만~2,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버킨, 켈리 백을 사느냐는 것이다. 에르메스라는 브랜드에 거금을 들이느니 그 브랜드의 핵심 디자인을 좋은 품질의 합리적 가격으로 소비하겠다는 새로운 트렌드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나는 이 대목에 주목했다. ‘명품이라는 물건은 과연 어떤 측면에 돈을 내고 구입해야 하는 상품인가?’라는 의문점이다. 그 브랜드의 이름값? 독창적인 디자인? 아니면 높은 품질의 원재료? 그도 아니면 이 모두를 합친 총체적인 가치? 나 역시 30대 여성 소비자로서 사만타 백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변에 실제로 사만타 백을 구입한 친구도 여럿 있다.

그녀들은 “100만 원대 초반의 루이비통 3초 백을 사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사만타 백 2개를 사는 게 낫다”고 했다. 가방의 가죽 품질과 로고가 없는 디자인에 더 가치를 둔 것이다. 실제로 친구들의 가방을 보니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누구나 에르메스 제품이 라고 오해할 정도로 디자인이 정교했다. 가죽의 색감이나 소가죽을 타조가죽처럼 올록볼록하게 엠보 가공 처리한 품질 모두 우수한 수준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녀들은 “에르메스 버킨 아니야?”라는 친구들의 질문에 “아니, 요즘 잘나가는 사만타 백이야. 못 들어봤니?”라며 당당하게 사만타 백임을 밝혔다. 절대 짝퉁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래서 나도 하나 구입했는데, 어찌나 꼼꼼히 잘 만들었는지 견고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가죽 색상과 엠보 무늬 등 모든 게 훌륭했다. 잠금장치와 바닥 오염을 막기 위한 징, 어깨끈의 길이감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명품 브랜드 제품들처럼 안쪽에 ‘사만타 백 by 이탈리아’라고 새겨진 것도 인상적이었다.

과연 무엇이 ‘명품값’을 하는 걸까. 예컨대 화이트 샤넬 백이 ‘이름값, 디자인, 희소성 등을 합친 총체적 의미의 명품’을 상징한다면 사만타 백은 ‘높은 품질과 좋은 디자인만을 채택한 가치 소비’를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가지 현상이 묘하게도 공존하는 사회, 바로 한국 명품 시장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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