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란 불청객이 조원태 회장을 찾은 건 그가 한진그룹 사령탑 자리에 오른 지 8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2019년 4월 취임한 뒤 ‘혁신 드라이브’ 속도를 차츰차츰 끌어올리던 조 회장의 계획은 한순간에 뒤틀렸다. 세계 136개국이 외국인 입국을 막는 상황에서 일개 항공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대한항공은 124개 노선의 70%가 넘는 89개 노선 운항을 중단했다.
갈 길을 잃은 여객기들이 있을 곳은 주기장밖에 없었다. 그걸 지켜보던 어느 날, 조 회장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코로나19에도 화물 수요는 늘어난 만큼 여객기를 화물기로 전환하면 여객 부문 손실을 메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주기료(공항 주차료)도 아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대한항공은 2020년 3월 13일 A330-300 여객기에 화물 20여t을 탑재해 베트남 호찌민 노선에 투입한 것을 시작으로 화물기 전환에 속도를 냈다. 유휴 여객기가 화물기로 투입된 건 그해에만 4500편에 달했다. 마스크, 의약품 등 화물 수요도 넘쳤다. 그로기 상태로 내몰린 해외 항공사들과 달리 그해 대한항공은 ‘나홀로 흑자’(2383억원)를 냈다.
◇역발상 전략으로 위기 극복
조 회장은 대한항공 화물사업본부장을 맡은 2013년 노후 화물기를 보잉 777F와 보잉 747-8F 등 최신 기종으로 교체했다. ‘해외직구’가 활성화하지 않았던 당시에 항공화물이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한 항공 경영자는 흔치 않았다. 조 회장 생각은 달랐다. 운임이 비싸도 빠르게 물건을 받을 수 있는 항공화물 수요가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많이 먹는 노후 화물기를 신형으로 교체하면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최신 기종으로 바꾼 건 코로나19 위기 때 대한항공 화물 사업이 성과를 내는 데 한몫했다.조 회장의 ‘역발상 경영’은 대한항공 여객사업본부장을 맡은 2009년에도 빛을 발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신종플루 유행으로 한국발 항공 수요가 급감할 때였다. 한국에서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 줄어들자 조 회장은 인천공항을 거쳐 제3국으로 여행하는 환승 수요 유치에 나섰다. 대다수 해외 항공사가 적자를 면치 못한 그해 대한항공은 1334억원 흑자를 냈다.
◇세계 10위권 항공사로 발돋움
화물기 승부수로 코로나19 위기를 넘긴 2020년 9월, 이동걸 당시 산업은행 회장이 조 회장을 찾았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부채비율이 2291%에 달했던 아시아나항공은 새 주인을 맞이하지 못하면 공중분해를 피하기 어려운 신세였다. 애초 인수자로 나선 HDC현대산업개발이 코로나19에 따른 항공 수요 급감을 이유로 두 손을 들자 시장에선 “국내에서 새로운 주인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란 말이 돌았다. 5대 그룹이 손사래를 칠 정도였다.이런 상황에서 아시아나항공 구조조정의 방향타를 쥔 산업은행이 대한항공에 SOS를 친 것이다. 조 회장 입장에선 ‘꽃놀이패’는 아니었다. 산업은행이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에 인수자금 8000억원을 지원하면서 “성과가 미흡하면 경영진을 교체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조 회장의 한진칼 지분을 담보로 요구했다. 하지만 조 회장은 자칫 경영권을 빼앗길 수 있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1조8000억원을 들여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결정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위한 선결 조건인 해외 경쟁당국의 심사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등 13개국 경쟁당국의 승인을 얻는 데만 꼬박 4년이 걸렸다. 조 회장은 수시로 해외 출장길에 올라 “아시아나항공과 합병한 이후에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항공기를 출발시켜 고객 선택 폭을 넓힐 수 있다”며 독과점 우려 해소에 공을 들였다.
결국 지난해 12월 미국 법무부(DOJ) 승인을 받으며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위한 마지막 관문을 넘었다. 세계 10위권이자 동북아시아 최대 항공사는 이렇게 출범했다. 대한항공 품에 안긴 아시아나도 공적자금 3조6000억원을 모두 갚았다. 대한항공은 올해 새로운 기업이미지(CI)를 발표한 데 이어 내년 아시아나항공과 본격적인 통합을 추진해 2027년 통합 항공사로 출범한다.
조원태 회장은…
트레이드 마크는 '현장경영'…"80돌 한진, 글로벌 종합물류기업 도약"
올해 창립 80주년을 맞은 한진그룹을 이끄는 조원태 회장은 조양호 선대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트럭 한 대로 운수업을 시작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회장이 조 회장의 할아버지다. 한진(韓進)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란 의미로 사업을 통해 우리 민족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겠다는 조 창업회장의 신념을 담았다. 조 회장은 이처럼 ‘수송보국’을 기치로 물류사업에 집중해온 한진그룹의 3세 경영인이다.트레이드 마크는 '현장경영'…"80돌 한진, 글로벌 종합물류기업 도약"
그는 2003년 한진그룹 정보기술(IT) 계열사인 한진정보통신 영업기획담당으로 입사한 뒤 2004년 대한항공으로 자리를 옮겨 경영기획팀, 자재부, 여객사업본부, 경영전략본부, 화물사업본부 등 항공업 핵심 업무를 두루 거쳤다. 2013년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출범을 진두지휘하며 ㈜한진→대한항공→정석기업→㈜한진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끊어내 투명한 지배구조를 확립했다.
조 회장은 글로벌 항공사가 모두 가입한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최고 정책 심의·의결기구인 집행위원회(BOG) 위원을 맡아 한국 항공업의 위상 강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2019년 6월에는 ‘IATA 서울총회’ 의장을 맡았다. 항공사와 항공기 제작사 등 세계 항공업 관계자 1000여 명이 참석하는 IATA 총회가 국내에서 열린 건 이때가 처음이다.
조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는 ‘현장 경영’이다. 그는 2017년 대한항공 사장으로 취임한 직후 “대표 사원이라는 자세로 솔선수범하면서 대한항공의 새로운 도약에 힘을 쏟겠다”고 약속했다. 취임 후 첫 행보로 대한항공 3개 노동조합(일반노조, 조종사노조, 조종사 새 노조)을 찾을 정도로 협력적인 노사 관계 구축에 힘을 쏟았다.
한진그룹은 항공(대한항공)과 물류(한진)를 중심으로 연매출 31조원에 42개 계열사와 세계 4만 명이 넘는 임직원이 함께하는 글로벌 종합 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조 회장은 “100년,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도 사랑받는 세계 최고 종합물류기업으로 커나가겠다”고 말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