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은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과정에서 참혹하게 터지고 부서진다. 육아 역시 전쟁에 비견될 정도로 힘들고 어렵다. 이 과정에서 평생 쌓은 경력이 흔들리거나 단절되는 일도 잦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주기도 한다. ◇ 파도처럼 밀려온 生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은실(42)의 개인전 ‘파고’에는 출산의 이 같은 양가적인 성격을 다룬 작품들이 나와 있다. 2006년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작가 단체전 ‘젊은 모색’, 2014년 리움미술관의 유망 작가 단체전 ‘아트스펙트럼’에 참가하는 등 일찌감치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며 작업과 생활 패턴은 크나큰 변화를 겪었다. 작가는 “임신과 출산 경험에 대한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소개한다”고 말했다.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로 7.2m에 달하는 대작 ‘에피듀럴 모먼트(Epidural Moment)’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깊은 산속 안개 사이로 승천하는 용을 그린 전통 동양화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사실 출산 도중 마취제를 맞았을 때의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고군분투’는 출산할 때 힘을 주다 실핏줄이 터져버린 붉은 눈을 클로즈업해 그린 작품이다.
‘절개’와 ‘흔적’은 각각 출산을 위한 피부 절개 부위와 튼살을 그린 것.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협곡을 흐르는 붉은 용암(‘멈추지 않는 협곡’)이 되고, 진통이 시작되기 전의 전조 증상은 바다 위 거대한 소용돌이(‘전운’)가 됐다.
작가는 출산의 고통을 미화하지도, 마냥 부정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갤러리 관계자는 “고통과 환희, 절망과 해방 등 서로 교차하는 입체적인 감정을 담은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전시 제목인 ‘파고’는 출산이 남긴 파동이 파괴에서 그치지 않고 회복과 순환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섭리임을 뜻한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 노골적인 몸 그림으로 외친 여성주의
이은실이 내밀한 경험을 작품으로 풀어냈다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1, 2관에서 전시를 열고 있는 장파(본명 장소연·44)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사회 전반의 문제점을 꼬집는 작품을 내놨다. 전시 제목은 ‘고어 데코(Gore Deco)’. 잔혹하고 역겨운 것을 뜻하는 ‘고어’와 장식을 뜻하는 ‘데코’를 합쳐 만든 말이다. 그 말대로 전시장 곳곳은 선홍색을 띤 신체와 내장 그림으로 가득하다.서울대 서양화과 00학번인 장파는 20대 초부터 인터넷에서 떠도는 여성 혐오 표현에 주목했다. 그는 “발달장애를 가진 가족과 함께 성장하며 계급·성별·장애에 따른 폭력을 종합적으로 체감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작품을 통해 이 같은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다. ‘문신’ ‘담배’ ‘피어싱’이 단적인 예다. 작품 속 여성의 내장에는 문신과 피어싱이 돼 있고, 입에 해당하는 곳에는 담배가 물려져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여성의 몸을 성(性)적인 대상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주체’로 표현한다.
전시장 전체에 깔린 파스텔톤 분홍색은 과거 남성 중심 사회에서 ‘소녀 취향’이라며 유치하게 여기던 색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 그림 속 신체 장기들이 기괴하게 뒤섞인 건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영향이다. 아름다운 꽃도 얼핏 더러워보이는 흙에 뿌리 내려 자라는 것처럼 바타유는 성스러운 것과 추한 것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세상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장파는 “고상함과 저속함의 경계를 무너뜨려 여성의 몸을 새롭게 보도록 의도했다”고 말했다.
K1관 입구 쪽 전시관에 있는 그로테스크한 흑백 드로잉 작품, 여러 캐릭터와 장식 등이 있는 벽면 곳곳의 장식을 눈여겨볼 만하다. 일반적인 아름다움과 거리를 둔 강렬한 작품이 많아 호불호가 갈리는 전시다. 컬렉터들에게는 인기가 많아 개막 직후 작품 대부분이 판매됐다고 한다. 전시는 내년 2월 15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