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의 패러다임이 예전에 보지 못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이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이다'라는 논리로 미국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안이한 생각이다." (유명희 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가 윤석열 대통령과 첫번째 정상 통화를 하면서 '조선산업에 협력을, 한국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라고 언급한게 힌트를 준다고 생각한다."(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
지난 7일 결과가 발표된 미국 대선에서 예상을 깨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완승을 거두자 우리나라에서는 '망했다'라는 반응이 많았죠.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무지막지한 통상 압력을 당한 경험 때문인데요.
싫든 좋든 '트럼프 2.0'은 현실이 됐고, 우리나라는 미국의 통상 압력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통상은 무역의 룰을 정하는 작업이죠. WTO 같은 다자무역체제와 FTA 같은 양자무역체제가 대표적입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통상은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요. 천만다행으로 우리나라에는 트럼프를 비롯해 역대 미국 정부의 통상 압력에 맞서 한국의 이익을 지켜온 통상 전문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들이 주인공들입니다. 우리나라의 통상 협상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들인데요. 글로벌 경제에 트럼프2.0이란 전대미문의 불확실성이 드리우면서 누구보다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경제신문은 트럼프 당선 직후부터 주요 본부장들을 릴레이 인터뷰했습니다. 지난 11일에는 전직 통상교섭본부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견을 나누는 자리도 있었는데요.
한국경제신문의 릴레이 인터뷰와 11일 좌담회를 종합해 전직 통상교섭본부장들이 콕 짚어 전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4대 주요 정책 변화와 트럼프의 4대 협상 전략과 스타일, 우리나라의 네 가지 대응전략을 딱10분간 요약해 드립니다.
조 바이든 행정부 4년 동안의 통상이 산업 정책의 보조 수단이었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통상을 핵심 정책으로서 가장 전면에 내세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트럼프 1기 정부의 미국무역대표부(USRT) 대표였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자신들의 정책을 '노동자 중심의 통상정책(Worker focused trade policy)'라고 불렀는데요.
기업의 이윤 향상보다 미국 근로자 계층을 중시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제조업 재건, 대중 견제 강화 등 지난 8년간 미국이 집권정당에 관계 없이 일관되게 밀어붙인 정책이 계속될 전망입니다.
가장 관심이 많은 분야죠. 트럼프 행정부는 모든 수입품에 대해 10~20%의 보편관세 도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일방적인 정책이다보니 '아무리 트럼프라도 설마 저걸 하겠어?'라는 반응이 많은데요.
여한구 전 본부장은 "'보편관세를 도입할까'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보편관세의 도입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트럼프 1기의 관료들을 만나보면 "1기 행정부때 공약 대부분을 실행한 만큼 허풍이 아니다"라고 전한다는 겁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모든 수입품에 10% 관세를 부과한 선례도 있습니다.
트럼프 1기 때 우리가 당한 경험 때문에 한국에서는 '미국이 또 한미 FTA 재협상을 하자고 요구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상당합니다. 전 통상교섭본부장들은 입을 모아 '한미 FTA 재협상'이 최우선 순위가 될 가능성은 낮다고 말합니다.
트럼프1기 때는 선거 유세 때마다 한미 FTA를 "힐러리 클린턴이 만든 끔찍한 협정"이라며 공격했는데 이번 유세 때는 한 번도 한미 FTA를 거론한 적이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여한구 전 본부장은 "보편관세가 한국 중국 멕시코 등 당면한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그물'이라면 개별 FTA 협상은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낚싯대'"라며 "여러나라와 현안이 산적한 미국은 한국 국회 비준 등 절차가 오래 걸리는 FTA 재협상보다 신속한 보편관세를 먼저 추진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트럼프가 공언하는대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칩스법)을 완전히 폐기하기는 정치적으로 어렵다는고 전직 본부장들은 입을 모읍니다. “두 법안 덕분에 엄청난 투자가 이뤄진 지역 대부분이 공화당 표밭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머스크 요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트럼프 당선에 큰 역할을 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있는 한 전기차와 배터리 등 연관 산업은 ‘머스크 요인’이 고려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진단입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변화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먼저 트럼프의 협상 전략과 스타일을 살펴봅니다.
트럼프 당선자가 다른 나라와 정상회담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이 나라와 미국의 무역적자 규모는?"이라고 합니다. 동맹국이든 FTA 체결국이든 상관없이 상대국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역수지라는 겁니다.
미국의 무역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트럼프가 가장 애용하는 수단이 관세입니다. 관세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는 수단이자 상대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도구입니다.
냉전시대였던 1986년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무역확장법232조(모든 수입 철강재에 25%의 관세를 일괄 부과하는 방안)를 2017년 꺼내든게 트럼프 행정부입니다. 유명희 전 본부장이 "통상관료 생활하면서 처음 들어본 수단"이라고 회상할 정도로 예상 밖의 카드였는데요.
여기에 예측하기 어려운 현안을 연계해서 상대국을 압박하는 것도 트럼프식 협상 전략입니다. 통상 협상을 하다가 느닷없이 불법 이민 문제를 연계시킨다거나 마약 대책을 요구하는 식입니다.
이견이 발생했을 때 '실무그룹을 만들어서 얘기해 봅시다', '검토해 보겠습니다'와 같은 시간 끌기 전략이 통하지 않는게 트럼프 협상 전략의 특징입니다. '이달 말까지 답을 안주면 바로 보복조치에 들어갈 것'이라는 식으로 상대를 압박합니다.
트럼프는 특정 국가나 기업에 대해 ‘죄수의 딜레마’와 유사한 전략을 통해 개별 협상을 유도합니다. 예를 들어 일괄 관세를 부과한 뒤 일부 국가에는 '2개월 내에 협상안을 가져오면 관세를 낮추거나 면제할 것'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상대 국가들을 편가르기합니다.
상대국이 서로 연대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하나씩 각개격파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트럼프가 속전속결형이라면 우리도 속전속결로 맞설 수 밖에 없다는게 전직 통상교섭본부장들의 조언입니다. 2017년 한국은 미국의 재협상 요구에 최대한 빨리 응해 3개월 만에 한미 FTA 개정 협정을 타결지었습니다.
중간 선거 전에 트럼프 행정부에 ‘작은 승리’를 주고 실속을 차리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결과였습니다. 시간을 끌었던 미국·캐나다·멕시코협정(USMCA)에서 멕시코는 훨씬 불리한 협상 결과를 받아들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해 한국이 미국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고, 가장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나라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이 미국의 산업정책에 적극 호응해 공급망과 교역을 중국에서 미국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는데 관세를 부과하면 동력이 사라지고, 미국의 지정학적 이익에 반할 것”이라고 미국을 설득하는 전략이 유효합니다.
트럼프가 예상 밖의 카드를 연계하는 전략을 자주 구사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틀을 깨는 연계 전략이 필요합니다. 통상의 범위를 좁히지 말고, 자동차와 방산협력 등 다양한 사안을 엮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여한구 전 본부장은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 한국 기업 없이는 미국의 제조업 재건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조선 군수산업 원자력 에너지 등 분야에서 '윈-윈 협력 패키지'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 1기 당시 한·미 FTA 재협상에서 한국 측 수석대표를 맡은 유 전 본부장은 “트럼프 1기 때 미국이 한미 FTA 폐기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업이 먼저 포착해 정부에 알려준 덕분에 빠른 대응이 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민관이 힘을 합쳐 신속하게 협상에 나선다면 보편관세 면제 등의 요구 사항을 반영시킬 수 있다”는 조언입니다.
여한구 전 본부장이 선임 연구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연구원들은 관세 장벽을 쌓아 올리는 오늘날의 미국을 ‘포트리스 아메리카(요새미국)’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티셔츠, 신발 같은 저부가가치 상품을 제외하면 중국산 제품이 더 이상 미국 시장에 들어오기 어려운 상황을 묘사한 표현입니다.
여 본부장은 “한국 기업이 포트리스 아메리카의 관세장벽을 넘기만 하면 중국 기업과 경쟁 없이 미국 시장 점유율을 높일 기회이기도 하다”며 “현지 기업 인수합병(M&A), 합작법인(JV) 설립 등 다양한 방안을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