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 러시아과를 졸업한 김은비 씨(28).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한 러시아어를 활용해 취업하려 했지만 ‘좁은 문’을 뚫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방탈출게임 제작사에서 잠시 일하게 되면서 정보기술(IT) 개발 직무에 관심이 생겼고, 어느 날 신문을 통해 한국폴리텍대를 알게 됐다. 시험과 면접을 통해 검증된 학생들이 입학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그저그런 교육이 아닐 것으로 생각한 김씨는 2021년 한국폴리텍대 분당융합기술교육원 데이터융합소프트웨어(SW)과에 입학했다. 지금은 금융SW 기업에서 IT 개발자로 3년째 일하고 있다. 김씨는 “폴리텍대는 입사를 희망하는 회사별로 클래스를 꾸려 교육을 받는 게 특징”이라며 “맞춤형 교육 덕분에 성공적으로 취직할 수 있었고 현재 맡고 있는 업무도 굉장히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대학을 졸업하거나 사회에 진출한 뒤 다시 폴리텍대에 입학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유턴 신입생’이다. 명문대를 졸업했더라도 원하는 기업에 취업하기 여의치 않거나 전공이 취업에 유리하지 않아 완전히 새로운 취업 스펙 장착에 나서는 것이다.
학생 4명 중 1명 ‘유턴 신입생’
23일 폴리텍대에 따르면 올해 폴리텍대 전체 입학생 중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폴리텍대에 입학한 유턴 신입생의 비중은 22.3%였다. 입학생 네 명 중 한 명이 유턴 입학생인 셈이다. 2020년 16.4%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다시 폴리텍대를 찾는 사례도 급증했다. 4년제 대학 졸업생 및 석·박사 졸업생 중 지난해 폴리텍대로 유턴한 학생은 전체 입학생의 16%에 달했다. 2020년에는 10.4% 수준이었다.
유턴 입학 비율이 높다 보니 신입생 평균 연령도 올해 기준 23.7세로 다른 대학보다 높은 편이다. 2019년에는 신입생 평균 연령이 21세였다.
명문대를 졸업해도 취업이 불투명할 만큼 취업난이 심각한 탓에 좀 더 유망한 업종으로 진로를 틀거나, 인생의 경로를 바꾸기 위해 폴리텍대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폴리텍대는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 직업교육훈련기관으로 일반 대학보다 훨씬 직접적인 취업 훈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양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이지호 씨(26)가 폴리텍대 광명융합기술교육원 증강현실시스템과에 다시 입학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이씨는 대학 졸업 후 군(軍)에 매력을 느껴 여성 육군장교로 2년4개월간 복무했지만, 상명하복의 구조 속에 반복적인 업무가 지속되자 진로 변경을 꿈꿨다. 그는 현재 폴리텍대에 입학해 메타버스 등 증강·가상현실 관련 기술을 배우고 있다. 이씨는 “최근 메타버스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졌지만 관련 기술은 아직 초창기로 반드시 증강·가상현실 세상이 찾아올 것”이라며 “폴리텍대에서의 배움을 토대로 해외에서 박사과정을 밟거나 취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삼전·포스코 등 취업률 80%대
폴리텍대를 졸업한 뒤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졸업생도 많다. 2년제 학위과정을 졸업한 학생의 취업률은 지난해 80.6%에 육박했다. 반도체, 자동화 등 인기 학과는 취업률이 90%를 넘기도 한다. 반도체·자동화 관련과 졸업생은 상당수가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이나 한국전력 같은 공기업에 취업하고 있다.김기남 씨도 폴리텍대를 통해 기존 직장보다 더 안정적 일자리를 구했다. 김씨는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웹 개발 직종으로의 전직을 꿈꾸며 내일배움카드로 관련 수업을 수강했으나, 정작 실무에서는 총무·회계 등 크게 전문성이 없는 일만 맡아왔다. 한계를 느낀 김씨는 지난해 분당융합기술교육원 임베디드시스템과에 입학해 전문성을 쌓았다. 현재는 토목건설업 분야 디지털솔루션 기업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폴리텍대를 다시 찾는 유턴 신입생이 늘고 있는 배경에는 저렴한 학비와 파격적인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폴리텍대 2년제 학위과정의 등록금은 학기당 130만원 수준이다. 직업훈련과정은 교육훈련비가 전액 무료이며, 월 11만6000원의 훈련수당 및 교통비도 지급된다. 성적우수 등 내부 장학금을 비롯해 외부 장학재단과 기업에서 주는 장학금 등 폭넓은 장학 혜택도 마련돼 있다.
이슬기 기자
■ 잡리포트 취재팀
백승현 좋은일터연구소장·경제부 부장
곽용희 경제부 기자 / 이슬기 경제부 기자
권용훈 사회부 기자 /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