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5만원권의 표지 인물을 바꿀 계획이다. 신사임당은 이제 시대에 안 맞으니 정주영, 신격호 같은 흙수저 출신 창업자를 고민 중’이라는 발표가 나오면? 난리가 나겠지. 여성단체가 맨 먼저, 그 뒤에 노동단체, 기타 등등이 줄줄이 서서 이유가 뭐냐고 성토할 거다. 지폐의 인물에는 가치관 이슈가 개입하고 돈도 꽤 들기 때문에 변경이 정말 어렵다. 그런데 일본이 지폐에 실리는 인물을 싹 바꿨고 최고액권인 1만엔권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낯선 인물이 등장했다. 그런데 일본은 세상 조용하다.
1958년에 처음 발행된 1만엔권의 인물은 쇼토쿠 태자였다. 율령 반포와 관료제 구축을 통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인물이다. 1958년, 일본은 패전 이후 6년이나 미군의 지배를 받은 끝에 겨우 주권을 돌려받고 민주국가를 건설한다는 시대적 과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대국가 체계를 완성해 일본의 정체성을 만들었다는 인물을 통해 당대의 사회적 ‘공기(空氣)’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1984년, 메이지유신 시기의 계몽운동가 후쿠자와 유키치로 교체한다. <서양 사정> <학문의 권유> 같은 책으로 당대에 200만권을 판매하는 기염을 토했던 인물이다. 그가 세운 대학교가 게이오대다. 대표적 주장이 ‘탈아입구(脫亞入歐)’인데 후진적인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처럼 확 ‘변신하자’는 뜻이다. 1980년대, 일본은 곧 미국을 따돌리고 경제 1위가 된다는 기대로 들떠 있었다. 그래서 곧 세계 1위가 되는 판에 ‘탈아입구’의 관점에서 강대국의 자신감을 가지고 할 말은 하자는 ‘공기’가 지배했고 후쿠자와가 그 상징으로 등장한 거다. 1년 뒤의 플라자합의를 기점으로 그 꿈에서 멀어졌지만 말이다.
다시 40년의 세월이 흘렀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시부사와는 일본 자본주의의 설계자로 불리지만 ‘연쇄 창업자’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일단 그는 변신의 귀재였다. 농부의 아들이었지만 ‘공기’가 바뀌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동네 청년들을 규합해 봉건막부체제를 뒤엎겠다는 어설픈 반란을 시도했다. 어설펐으니 초반에 들통이 났고 도망자로 전전하다 막부에 잡혔는데 관료로 발탁된다. 재주 하나는 탁월했던 모양이다. 쇼군이 선진국을 배우라고 동생을 유럽으로 보내면서 수행비서로 발탁했다. 그렇게 프랑스 파리에서 2년을 보내고 귀국했는데 바로 막부를 떠나 메이지 혁명정부의 기재부(대장성) 차관이 된다. 변신인지 배신인지. 하지만 사무라이 일색인 혁명정부에서 농부에 막부 관료 출신, 궁합이 맞을 리 없었고 금방 그만두고 서양의 주식회사 시스템을 도입해 연쇄 창업을 시작한다. 미즈호은행이 된 제1국립은행, 증권거래소, 도쿄가스, 도쿄화재보험, 제국호텔, 기린맥주, 태평양시멘트 등 무려 400개의 기업을 창업했다. 그야말로 숨 쉬듯 창업을 저질렀다.
자신감이 넘치던 1980년대를 정점으로 일본의 경제성장이 딱 멈췄다. 그걸 어떻게든 되살려보겠다고 엄청난 정부 빚을 발행해 재정도 뿌려보고, 금리를 마이너스로 만드는 희대의 통화정책도 써 봤지만, 백약이 무효. 그리고 깨달았다. 대기업의 경쟁에서 밀려 이렇게 된 게 아니라는 걸. 40년 전엔 신생이던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 존재하지도 않았던 아마존과 구글, 그리고 미래에 선두가 될 스타트업들이 일본을 계속 밀어내고 있다는 걸. 당대의 미국 대기업도 그들에게 밀려났다는 걸. 다시 일본 경제를 회생시킬 방법도 그런 생태계 구축에 있다는 걸.
작년 말,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스타트업 장관을 신설하고 스타트업 투자를 10배나 늘려 유니콘기업을 100개 이상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전설적인 창업가 시부사와가 1만엔권에 등장했다. 좀처럼 안 바뀌는 일본, 도장 좀 폐기하자는 것도, 팩스를 버리고 메일로 바꾸자는 것도 일심동체로 거부하는 신묘한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사회적 공기’가 바뀌었다고 느끼는 순간, 언제 그랬냐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 그런 그들의 특성이 정말 무섭다는 걸 150년 전에 우리가 뼈저리게 경험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공기’가 바뀌고 있다. 이런 때 어떤 나라는 예산이 부족하다며 그 생태계 관련 투자액을 삭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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