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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아름다움도 몰라"...'촌년'이라 비난한 이유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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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그린 초상화인데 나랑 하나도 안 닮았잖아요. 이건 도저히 안 되겠네요. ”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샤넬을 만든 천재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눈앞에 있는 화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육원에서 자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자수성가한 샤넬. 그녀는 최고의 디자이너가 된 자신의 당찬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을 그릴 화가로는 자신처럼 자수성가한 여성 화가가 제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샤넬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성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물은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림 속 샤넬은 실제 샤넬과 닮은 구석이 거의 없었거든요. 인물의 분위기 역시 강력하기보다는 섬세했고, 당차다기보다는 우울했습니다. “돈을 받고 싶으시면 그림을 고쳐주셔야 해요. 아니면 새로 그리던가.” 샤넬은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화가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빨개졌습니다. 비록 화풍은 부드럽고 섬세했지만, 화가 역시 온통 남자뿐인 미술판에서 실력과 뚝심으로 살아남은 여걸. 작품을 고친다는 건 화가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됐어요. 싫으면 마세요.” 도로 그림을 집어 든 화가는 이 말만 남기고 방을 나와 그림을 창고에 처박아 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림에 관해 물어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샤넬, 그 여자가 좋은 사람이긴 하지. 하지만 그림 보는 눈은 없더라. 파리지엔느인 나와 달리 뭘 모르는 ‘촌년’이라 그런가 봐. 그 그림은 다른 사람한테 팔아버리든지 하지 뭐.”

세계적인 천재 패션 디자이너 샤넬을 ‘뭘 모르는 촌사람’ 취급한, 그 화가의 이름은 마리 로랑생(1883~1956). 그녀는 20세기 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봄비 내리는 날, 오늘은 봄비 같았던 그녀의 삶과 작품, 그 속에 숨겨진 사랑과 곡절들을 소개합니다.

자화상, 꽃피다
1883년 10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로랑생의 출생신고서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파리로 올라온 그녀의 어머니는 가정부 생활을 하던 중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로랑생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따로 가정이 있었습니다. 양육비는 부족하지 않게 줬지만, 남자는 딸의 호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걸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로랑생은 어린 시절을 어머니와 단둘이 보냈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이런 일은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로랑생은 착하고 섬세하지만 자신감 없는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어머니는 그녀가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공부에 별 흥미가 없던 로랑생의 성적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로랑생이 좋아하는 건 오직 그림뿐. 로랑생은 수업 시간에도, 박물관에서도, 집에 가는 길거리에서도, 꿈속에서도 항상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랑생은 용기를 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화가가 되고 싶어요.” 어머니는 별말 없이 그녀를 예술 학교에 보내줬습니다.



로랑생은 학교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공장에서 화가 커리어를 시작했던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똑같은 출발이었습니다. 이어 로랑생은 유화를 배웠습니다. 재능과 노력 덕분에 그녀는 미술 학교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 내가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그림들처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 시절 로랑생은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랑생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녀의 재능은 이미 안목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1904년 스물한 살의 성인이 된 로랑생은 미술 학교 스승의 손에 이끌려 몽마르트르에 있는 낡은 목조 건물에 들어섭니다. 건물의 별명은 ‘세탁선’. 건물 모양이 당시 파리 센 강 위에 떠서 강물로 빨래를 하는 배와 닮았다는 이유에서 붙은 이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로랑생은 피카소를 비롯해 먼저 둥지를 틀고 작업 중이던 예술가들과 만납니다.





이곳에서 그녀의 그림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파리의 예술계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비롯해 야수파, 초현실주의 등 20세기 전반 미술계를 지배하는 미술사조가 꿈틀대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로랑생은 그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자신만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암울하던 그녀의 자화상 속 얼굴도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세 살 연상의 젊은 작가이자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두 남자
1907년 로랑생이 아폴리네르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 로랑생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아폴리네르는 이미 파리 예술계 전반의 유명 인사였습니다. 그는 문학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고, 똑똑했고, 성격도 좋았습니다. 덕분에 그는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로랑생도 유쾌하고 지적인 아폴리네르에게 푹 빠졌습니다. 아폴리네르도 아름답고 재능 있는 로랑생을 사랑하게 됐고요.



아폴리네르와 그녀는 닮은 점이 많았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어머니와 함께 살며 어머니의 영향력을 크게 받았습니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고집이 있었고, 성격이 예민했다는 점도 똑같았습니다.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들의 연애가 대개 그렇듯 둘은 걸핏하면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아폴리네르의 바람기도 문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결국 둘은 다시 서로를 찾곤 했습니다.

화가들과 친했던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이 앙리 루소를 비롯한 여러 화가와 친해지는 데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로랑생에게 예술적 조언을 해 주고, 그녀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비평 글도 여럿 썼습니다. 덕분에 로랑생은 파리 예술계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로랑생은 손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화가 로랑생보다는 아폴리네르의 ‘뮤즈’로, 독립적인 화가보다는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파 화가들의 ‘마스코트’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던 겁니다. 예술가들이 그녀를 “야수파의 소녀”(로댕)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에 낀 불쌍한 사슴”(장 콕토)으로 불렀던 게 이를 방증합니다. 로랑생은 훗날 회고했습니다. “세탁선에서 작업한 5년은 웃음과 눈물이 함께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곳의 예술가들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지만, 위험한 구석도 있었습니다.”



로랑생과 아폴리네르의 연애는 싸우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6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할 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번번이 결혼이 엎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1913년 로랑생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가족이 사라진 겁니다. 로랑생의 가슴에는 구멍이 뚫렸습니다. 여전히 아폴리네르와의 관계는 지지부진했고, 눈물과 다툼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때 다가온 남자가 있었습니다. 미술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던 독일 출신의 귀족, 오토 폰 와트젠 남작이었습니다. 그는 조금 무뚝뚝했지만 키가 크고 잘생겼고, 밤마다 세련된 클럽에서 춤을 추는 걸 좋아했습니다. 아폴리네르에게 없는 매력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불안정한 삶에 지친 로랑생은 1914년 와트젠을 만나기 시작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그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폴리네르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몇 달 동안 로랑생과 연락을 끊고 있는 사이 로랑생의 결혼이 진행됐거든요. 이전에도 싸우고 한참 연락하지 않은 적이 많았기에, 아폴리네르는 연락 두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제야 화해하겠군.’ 로랑생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아폴리네르가 이렇게 생각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폴리네르가 약속 장소에 들어서자 로랑생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전할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아폴리네르는 대답했습니다. “저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하지만 당신 소식부터 말해 주세요.” “나, 결혼했어요.”

아폴리네르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재미있는 농담이네요.” 하지만 로랑생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남편은 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 오토 폰 와트젠.” 아폴리네르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로랑생은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자, 이제 당신의 좋은 소식을 말해 주세요.”



아폴리네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바로 자리를 떴습니다. 그렇게 아폴리네르의 사랑은 끝났습니다. 그때 아폴리네르가 로랑생에게 말하려 했던 좋은 소식이 무엇이었는지는 영원히 아무도 알 수 없게 됐습니다. 그게 둘의 마지막 만남이었거든요.

훗날 아폴리네르는 로랑생과의 사랑을 <미라보 다리>라는 시로 남겼습니다.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황현산 번역).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가장 불쌍한 여자는…”
꿈 같은 신혼 생활을 막 시작한 로랑생. 하지만 그녀의 앞에는 커다란 불행이 놓여 있었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고작 6일 뒤인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사건 직후부터 세계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한 달 남짓 지난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에 동시에 선전포고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습니다.



문제는 로랑생이 독일인과 결혼한 탓에 당시 국제법에 따라 독일인이 됐다는 겁니다. 파리 토박이인 로랑생은, 졸지에 적국의 여인이 돼버렸습니다. 그대로 파리에 남아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 로랑생 부부는 허겁지겁 긴급 출국 서류를 받아 스페인으로 겨우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망명 생활은 최악이었습니다. 남편의 자산이 독일에 모두 묶여버린 탓에 둘의 생활은 넉넉지 못했습니다. 스페인의 생활과 문화 수준도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 파리에 비하면 한참 수준이 낮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건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술을 마시면 폭언을 퍼부었고, 바람기까지 심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몰랐던 일이었습니다. 로랑생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결혼하고 나서 3개월 만에 나를 잊어버렸어.” 이때 로랑생이 남편의 배신으로 인한 고통, 고된 망명 생활, 파리 예술계에서 잊힌 서러움을 담아 쓴 시가 <불쌍한 여자>입니다.
권태로운 여자보다 더 가엾은 것은
슬픈 여자입니다.
슬픈 여자보다 더 가엾은 것은
불행한 여자입니다.
불행한 여자보다 더 가엾은 것은
버려진 여자입니다.
버려진 여자보다 더 가엾은 것은
떠도는 여자입니다.
떠도는 여자보다 더 가엾은 것은
쫓겨난 여자입니다.
쫓겨난 여자보다 더 가엾은 것은
죽은 여자입니다.
죽은 여자보다 더 가엾은 것은
잊힌 여자입니다.

이런 망명 생활은 1914년부터 햇수로 5년간 이어졌습니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 뒤에야 로랑생은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해 로랑생은 옛 연인이었던 아폴리네르에 관한 두 개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첫 번째는 5월. 아폴리네르가 ‘예쁜 빨간 머리’라는 별명의 여성과 결혼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충격적인 두 번째 소식은 11월에 들려왔습니다. 아폴리네르가 병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지요. 애증이 뒤섞인 사이였지만,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이 자기 삶을 통틀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랑생이 아폴리네르의 죽음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정확히 기록돼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몇 년 뒤 남편과 이혼해 자유의 몸이 된 로랑생은, 가벼운 연애는 많이 했지만 진지한 사랑은 평생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사랑에, 남자에 질려서였겠지요. 하지만 미라보 다리를 건널 때만큼은 로랑생도 아폴리네르를 문득문득 떠올렸을 겁니다.
자유롭고 산뜻한 삶
개인사와 별개로 로랑생은 파리에 돌아온 직후 다시 인기 작가로 떠올랐습니다. 그녀의 독특하면서도 세련된 작품은 예술계와 대중의 찬사를 받으며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 당시 아르데코(Art Deco) 사조의 유행도 인기를 부채질했습니다. 언론들이 “서양의 주요 미술관 중 로랑생의 작품이 없는 곳은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포스터 디자인, 의상 디자인…. 로랑생은 거침없이 자신의 예술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수많은 유명인이 로랑생에게 앞다퉈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코코 샤넬처럼 “초상화지만 모델과 별로 안 닮았다”며 불평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습니다. 로랑생이 대상의 모습을 정확히 그리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나본 상대방의 ‘느낌’을 작품에 담았거든요. 아마도 로랑생의 샤넬 초상화는, 겉으로는 드세고 당차지만 속엔 연약하고 섬세한 구석도 있는 샤넬의 내면을 꿰뚫어 본 결과일 겁니다.

로랑생은 제멋대로였습니다. 자신이 그리고 싶지 않은 작품을 그려야 할 때는 값을 엄청나게 올려 받았고, 여성과 어린이 그림을 그리는 것만 좋아해서 남성 모델에게는 두 배의 가격을 요구했으며, 금발보다 갈색 머리 모델에게 더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서머싯 몸, 장 콕토, 폴 엘루아르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뻐하며 로랑생의 초상화에 기꺼이 돈을 지불했습니다. 이런 인기 덕분에 로랑생은 1930년대 프랑스 최고 국가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큰 부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지나갔다는 건, 그 작가가 최고의 작품을 그리는 시기가 지나갔다는 뜻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로랑생도 그랬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그의 작품이 “다 비슷비슷하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르데코 유행이 지나가면서 로랑생과 같은 화풍이 구식으로 취급받게 된 것도 이런 비판에 힘을 실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로랑생의 창작력이 전성기보다 못해진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래도 로랑생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마치 언제까지나 늙지 않는 소녀 같은 사람이야. 우울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고요하면서도 변덕스럽고, 사랑과 우정에 충실하면서도 불성실한 신비로운 사람.” 이런 성격 덕분에 세간의 비판은 로랑생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계속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았습니다. 1956년 73세의 나이로 조용히 평온하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런 삶은 이어졌습니다.
시대의 신선함
미술사에서 로랑생은 독특한 존재입니다. 로랑생은 입체파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 사조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야수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현실주의는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고, 추상미술은 싫어했습니다(로랑생은 생전 “추상적인 건 지루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선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그의 그림 속에는 몽상과 변덕, 곡절 많은 삶의 습도가 녹아 있었습니다. 사람도 독특했습니다. 로랑생은 다른 그 누구와도 본질적으로 섞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런 독특함 덕분에 로랑생의 작품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매력을 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오늘날에도 로랑생은 인기 있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 독특함 탓에 매력을 딱 떨어지는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로랑생과 동시대를 살았던 페루의 작가 벤투라 가르시아 칼데론의 비평입니다. 그 비평에 조금 의역을 덧붙여 소개하며 오늘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미래의 아이들이 우리 시대 역사를 돌아볼 때, 그들은 전쟁을 비롯해 우리가 만든 지옥과 우리가 저지른 죄들에 대해 읽게 될 겁니다. 우리의 시대가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로랑생의 작품은 마치 ‘우리 시대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합니다. 로랑생의 그림은 변질되기 쉬운 연약한 세상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존재했던 세상의 신선함과 상쾌함, 순수한 즐거움이 그녀의 캔버스에 영원히 보존돼 있어 같은 시대 사람으로서 기쁠 따름입니다.

로랑생의 그림과 함께, 상쾌한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는 Marie Laurencin(Flora Groult 지음), Marie Laurencin: Artist and Muse (Douglas K.S. Hyland, Heather McPherson 지음), Marie Laurencin(Rizzoli 도록), 일본 도쿄 아티존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도록 Marie Laurencin : An Eye for Her Time 등을 참조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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