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영국 케임브리지 근교 일리 대성당.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에든버러 축제 합창단,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와 함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의 5악장 ‘피날레’를 연주한다. 번스타인은 평소 지론대로 ‘온몸으로’ 지휘한다. 팔짝팔짝 뛰기도 하고 합창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한다.
말러 애호가라면 유튜브를 통해 한 번쯤 봤을 만한 영상이다. 다음달 6일 개봉하는 넷플릭스 제작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에 이 장면이 재현된다. 실제 일리 대성당에서 번스타인 역의 브래들리 쿠퍼가 런던 심포니, 합창단, 소프라노 등과 함께 연주한다.
영화가 실제와 다른 점은 무대 옆에서 남편 번스타인의 지휘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 콘 번스타인(캐리 멀리건 분)의 표정을 카메라가 때때로 비춘다는 점이다. 연주가 끝나자 객석의 환호와 박수를 뒤로하고 번스타인은 아내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키스한다. 펠리시아는 환한 표정으로 남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당신 마음에 가득했던 증오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네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20세기 위대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번스타인의 예술적 성취와 업적을 다룬 전기 영화가 아니다. 극은 레니(번스타인의 애칭)와 그의 아내 펠리시아의 평생에 걸친 인연과 사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극 중 시기로 보면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다.
2018년 개봉한 ‘스타 이즈 본’을 연출한 쿠퍼가 두 번째로 주연에 감독까지 해낸 작품이다. 쿠퍼는 레니와 그의 가족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서 범상치 않은 번스타인 부부의 사랑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레니의 성적 정체성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영화 초반부터 충격받을 수 있겠다. 25세의 보조 지휘자에 불과하던 레니가 전화로 뉴욕필하모닉 데뷔 소식을 통보받는 장면이다. 기쁨에 팔짝 뛰는 레니의 방 안 침대에는 동성 애인이 거의 벌거벗은 채 누워 있다. 번스타인 부부의 첫째 딸인 제이미의 회고록에 따르면 레니는 평생에 걸쳐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남편의 성적 정체성을 감수하고 세 자녀와 함께 가정생활을 이어가던 펠리시아가 폭발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펠리시아는 레니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미사곡의 초연을 남편 옆에 앉아 관람한다. 미사곡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레니는 오른쪽에 앉은 아내가 아니라 왼쪽에 있는 남자의 손을 꼭 붙잡는다. 그 모습을 본 펠리시아는 분노와 씁쓸함이 섞인 듯한 표정을 짓는다. 결별 직전까지 갔던 두 사람의 관계는 레니의 새로 태어난 듯한 모습에 펠리시아의 마음이 풀리면서 회복된다.
펠리시아가 간암에 걸리고 레니는 그런 아내를 집에서 헌신적으로 돌본다. 제이미와 니나, 알렉산더 등 세 자녀도 집에 모인다. 때마침 셜리 엘리스의 흥겨운 ‘클랩 송’이 흐르고 펠리시아를 안고 춤추던 레니는 세 자녀도 다 함께 꼭 끌어안는다. 눈물을 훔칠 만한 장면이다.
두 부부의 특별한 사랑과 가족애에 집중하다 보니 화려한 레니의 예술적 성취와 업적, 매카시즘 시기에 겪은 고난 등은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 얽힌 에피소드조차 없다. 하지만 ‘인간 번스타인’의 삶과 고난, 예술적 열정 등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다. 레니와 펠리시아 역을 맡은 두 배우의 호흡과 열연이 단연 돋보인다. “6분21초 분량의 지휘 장면을 익히는 데 6년이 걸렸다”는 쿠퍼의 지휘 장면은 번스타인을 보는 듯했다.
쿠퍼가 치는 번스타인의 오페라 ‘콰이어트 플레이스’ 연주곡 등 음악 완성도도 높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음미할 만하다. 넷플릭스에는 다음달 20일 공개된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