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1월 23일 14:58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SK그룹의 11번가가 싱가포르의 큐텐(Qoo10)에 매각이 불발된 가운데 재무적투자자(FI)들의 주도 하에 강제 매각될 전망이다. SK스퀘어는 FI가 보유한 지분을 사갈 권리가 있지만 이를 행사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2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11번가 최대주주(지분율 80.26%)인 SK스퀘어는 내달 초까지 FI가 보유한 11번가 지분을 살 수 있는 권리(콜옵션)가 있지만 행사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달 말 이사회를 열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으로 전해졌다.
콜옵션을 행사했을 경우엔 원금 5000억원에 내부수익률(IRR) 연 8% 이자를 붙여 돌려줘야 한다. FI는 2018년 5000억원을 투입해 지분 18.18%를 확보한 H&Q코리아와 이니어스프라이빗에쿼티(PE)다. 올해 9월까지 기업공개(IPO)를 통한 투자회수를 약속했지만 IPO에 이어 매각까지 불발되면서 옵션이 발동했다.
대신 FI가 11번가 경영권 강제매각에 나설 가능성이 유력하다. FI들은 내달 중순부터 SK스퀘어가 보유한 지분까지 묶어 동반 매도할 수 있는 권리(드래그얼롱)를 갖고 있다. 드래그얼롱이 실제 행사될 경우 투자업계에선 이례적인 사례가 된다. 사실상 경영권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했단 점에서 드래그얼롱은 자본시장에서 최후의 시나리오로 받아들여져 왔다.
새 주인 찾기가 수월하지 않았던 SK로선 드래그얼롱이 행사될 경우 엑시트(투자 회수) 공이 FI로 넘어가는 상황에 직면한다. 통상 대주주가 극도로 싫어하는 상황이지만 현 SK에겐 매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옵션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SK는 유력 인수 후보였던 큐텐과 협상에서도 매각 성과에 대한 부담이 컸다. '배임' 소지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SK스퀘어는 2018년 투자유치로 평가받은 2조7500억원에는 못 미치더라도 최대한 합병비율을 유리하게 산정하고 싶어했지만 큐텐은 기업가치 1조원 미만을 제시했다. 큐텐 제안을 받아들이면 주주들로부터 배임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내부 반대 여론을 의식해 결국 매각을 중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e커머스 투자에 대한 의지에도 양측은 온도차가 컸다. 구영배 큐텐 회장은 같이 손잡고 이커머스 시장을 다시 부흥시켜보자는 목적이 있었다. 대규모 공동투자 의사도 타진했다. 구 회장은 티몬, 인터파크커머스, 위메프 인수에 이어 11번가까지 품으면서 함께 쿠팡 네이버와 대적할 수 있는 공룡 플랫폼을 만들기를 원했다. 반면 SK는 10~20% 지분을 남기고 공동경영에 나서는 데엔 찬성했지만 'e커머스를 크게 키워보자'는 제안엔 공감하지 않았다. e커머스에 대한 SK그룹의 의지가 이전같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룹 임원 인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수천억원이 지출되는 콜옵션 행사에 총대를 멜 인사가 없다는 점도 거론되고 있다. 여러 사정 탓에 일단은 FI에게 선택을 맡기고 다시 밸류업 기회를 엿보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사실상 SK스퀘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란 평가가 나온다.
공을 넘겨받은 FI들로선 쉽지 않은 매각을 성사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을 수 있다. 드래그얼롱을 행사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원하는 가격에 매각이 성사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펀드 출자자(LP)들의 투자 회수 시점도 요원하다. H&Q코리아(4500억원)는 국민연금, 이니어스PE(500억원)는 새마을금고로부터 자금을 유치했다.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동거'를 계속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SK의 콜옵션 행사 포기가 현실화할 경우 투자업계에 끼칠 파장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은 11번가 외에도 콜옵션과 드래그얼롱이 포함된 유사한 구조로 다수 계열사의 투자유치를 해왔다. 투자한 PEF 운용사와 이들이 조성한 펀드에 자금을 넣은 연기금 공제회 금융사 등 LP들이 11번가에 특히 예의주시하는 배경이다.
하지은 기자 hazz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