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만도기계(현 위니아)가 내놓은 김치냉장고는 대히트를 쳤다. 출시 이듬해 2만5000여 대였던 판매량이 1999년 50만 대를 넘어섰다. 아파트 거주자가 늘며 마당에 김칫독을 묻기 어려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준 덕분이었다.
김치냉장고의 흥행으로 피해를 본 산업이나 기업은 없었다. 일반 냉장고는 일반 냉장고대로 잘 팔렸다. 김치냉장고 시장은 일반 냉장고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시장이었다. ‘비파괴적 창조’의 대표적인 예다.
2005년 <블루오션 전략>을 출간해 전 세계에 ‘블루오션 열풍’을 일으킨 김위찬(왼쪽)·르네 마보안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 교수(오른쪽)가 <비욘드 디스럽션>을 통해 비파괴적 창조라는 개념을 새로 들고나왔다. 미국에서 지난 5월 출간된 후 한국에서도 책이 배본되기 전부터 교보문고, 예스24 등 온라인서점에 예약주문이 쇄도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1942년 ‘창조적 파괴’를 주창한 뒤 수많은 사람에게 ‘혁신은 곧 파괴’였다. 낡은 것을 부수어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또 성장할 수 있다고 여겼다.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2007년 아이폰의 등장은 휴대폰뿐 아니라 MP3플레이어, 카메라, 캠코더 산업을 뒤흔들었다. 아마존 등 인터넷 서점은 오프라인 서점을 고사시켰고, 넷플릭스는 DVD 대여점을 없애버렸다.
저자들도 파괴적 창조로 인한 혁신과 발전을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그게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고 말한다. 산업의 판도가 바뀌면서 대량 실업이 발생하는 등 혼란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파괴적 창조를 추구한 기업이 큰 저항에 부딪혀 사업이 좌초되기도 한다. 택시업계에 도전했던 한국의 타다, 3D(3차원) 프린팅 교정기로 치과업계의 파이를 가져가려 했던 미국의 스마일다이렉트클럽 등이 그런 반발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다.
비파괴적 창조는 블루오션 전략과 닮았지만, 기존 산업의 경계 밖에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 다르다. 닌텐도의 ‘위(Wii)’는 10~30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콘솔 게임기를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게 바꿨다는 점에서 블루오션 전략에 해당한다. 반면 ‘액션캠’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카메라 시장을 만들어 낸 고프로는 비파괴적 창조에 해당한다.
여객기의 발달로 여객선 산업이 하향세를 타자 현대 크루즈 산업을 개척한 영국의 큐나드, 이메일의 등장에 손편지가 줄자 홀몸노인 가정 방문 서비스로 활로를 찾은 프랑스 우편 공기업 라 포스트, 방치된 자투리땅을 주차장으로 바꿔주는 일본의 파크24 등도 비파괴적 창조의 산물이다.
김 교수와 마보안 교수는 “혁신이 꼭 파괴적일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기존의 것을 깨부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혁신을 일궈내는 비파괴적 창조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들은 “비파괴적 창조는 기업이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을 함께 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해지는 앞으로의 시대에 더욱 주목받을 성장 전략”이라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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