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광 기자옛날에 금호그룹이라고 있었어요. '뭔 소리야, 금호그룹 아직 있잖아. 금호타이어도 있고, 금호리조트도 있고. 금호 들어가는 회사가 얼마나 많아.' 사실 우리가 아는 금호그룹, 정확히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해체됐어요. 그룹의 핵심인 아시아나항공은 대한항공에 넘어갔고, 금호타이어는 중국 회사가 인수했죠. 현재 금호그룹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금호고속, 금호건설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룹이라고 부르기도 좀 민망하죠. 불이 나서 다 타고 가재도구 몇 개 챙긴 수준이에요. 그런데, 금호그룹에 알짜가 하나 남아 있었어요. 잿더미를 뒤졌더니 금고에 금덩이가 있는거지. 그 금덩이가 어디냐. 금호석유화학입니다.
금호석유화학. 들어는 본 것 같은데. 이게 뭐 금덩이까지 하냐. 하실수 있죠. 이 회사는 고무나 플라스틱 원료 같은 것 만드는데요. 작년에 매출이 약 8조원, 영업이익은 1조원을 넘겼습니다. 국내에서 연간 영업이익 1조원을 넘기는 곳이 채 50곳 안 되는 것을 감안하면, 금덩이 맞죠. 잘 하면 이 금덩이로 불탄 집도 다시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제는 금호그룹 재건의 핵심, 금호석유화학 입니다.
금호석유는 금호그룹 창업주인 박인천 회장의 넷째 아들, 박찬구 회장이 이끌고 있어요.
박인천 회장은 아들이 다섯명 있었는데, 박인천 회장 사후에 첫째인 박성용 회장, 그리고 차남인 박정구 회장, 삼남 박삼구 회장까지 사이 좋게 돌아가며 회장직을 맡습니다.
형제 간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해요. 회장 정년은 65세로 하고, 회장 임기는 10년, 형제 간 합의해서 회장 추대 등등. 그런데, 셋째 박삼구 회장에서 넷째 박찬구 회장으로 총수 지위가 넘어가기 이전에 큰 일들이 터져요. 우선, 형제 간 갈등이 생기죠.
금호아시아나가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을 잇달아 인수했는데요. 이 때 쏟아 부은 돈이 무려 10조원이나 했습니다. 건설 1위, 물류 1위 회사를 먹으려고 다른 사람 돈을 엄청 끌어다 썼어요. 덩치가 너무 커서 먹다가 체한다, 하는 소리가 당연히 주변에서 터져나왔죠. 박삼구 회장은 그런데 밀어 부쳤습니다. 스타일이 통이 크다고 해야 할까. 선이 굵고 공격적이었어요.
그런데 동생인 박찬구 회장은 스타일이 전혀 달랐거든요.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꼼꼼하고 세심했습니다. 먹다가 체한다고 한 사람, 바로 박찬구 회장이었어요. '형님, 이건 아닙니다. 있는 거나 잘 합시다' 하고 만류합니다. 그룹을 키울 게 아니라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주장해요. 물론 안먹혔어요. 오히려 사이만 나빠졌죠.
또 박삼구 회장이 형제 경영의 틀을 깨고 그룹을 동생이 아닌, 아들에게 주고 싶어 했어요. 이것도 둘이 갈라서게 된 계기가 됩니다. 돌아가는 판을 보니까, 박찬구 회장이 살짝 '나가리' 분위기였던거죠. 그래서 박찬구 회장이 승부수를 던집니다. 이럴 거면 본인은 화학 계열사만 가지고 나가겠다. 박찬구 회장이 금호석유 대표를 지냈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잘 아는 석유화학 계열사를 달라고 요구해요.
그런데, 형이 이것도 안된다고 하는거야. 그래서 서로 법정 공방까지 하면서 싸우게 됩니다. 그 유명한 금호그룹의 '형제의 난'이에요.
이렇게 싸우는 사이에 그룹은 완전히 망가지게 되죠.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고, 무리하게 사업을 키운 금호아시아나는 빚을 결국 못 갚아요. 돈 못 갚으면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있는 거 다 가져가잖아요. 여기에서 빚쟁이는 채권단, 은행이죠.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한 지 몇 년 만에 다 토해내고. 이것도 모자라서 그룹의 핵심인 아시아나항공마저 빼앗깁니다. 그룹이 완전히 공중분해 됐어요. 또 그룹의 총수인 박삼구 회장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까지 됩니다.
그럼 박삼구 회장과 갈라선 박찬구 회장은 어떻게 됐느냐. 화학 계열사들 가지고 나와서 2015년 말에 독립하는 데 성공해요. 이미 형이 이끄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만신창이가 됐으니, 이거라도 지키겠다면서 각자의 길을 가죠.
결과론적이지만 박삼구 회장은 '석유화학 계열사들이 그대로 있었으면 그룹 해체까진 안 됐다'는 입장이고. 박찬구 회장은 '내가 석유화학 분리 안 했으면 이것도 다 형이 털어먹었다' 하는 입장이에요. 박찬구 회장의 금호석유는 이후에 큰 기회를 얻습니다. 조금 역설적인데, 그 기회는 코로나였어요.
코로나로 전세계가 고통 속에 신음할 때. 갑자기 수요가 폭발한 산업이 있었으니. 음식 배달, 온라인 쇼핑은 다 아실테고. 사람들이 이 산업은 생각을 잘 못해요. 바로 라텍스 장갑입니다.
라텍스 장갑, 이거 코로나 이전에는 잘 안 보였거든요. 근데, 코로나 터지고 병원이나 학교, 급식실 같은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만지면 코로나 걸린다니까, 사람들이 장갑부터 끼고 본겁니다. 라텍스 장갑에 들어가는 소재, 이걸 금호석유가 잘 만들어요. NB라텍스라고 하는데요. 심지어 시장 점유율이 30%에 달하는 글로벌 1위입니다.
NB라텍스 산업 호황은 가격만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요. 코로나가 터진 직후인 2020년 상반기에 톤당 800달러쯤 하던 것이 이듬해인 2021년 2분기 2100달러를 넘어가요. 가격이 2.5배 껑충 뛰었죠. 부르는 게 값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덕분에 코로나 이전인 2019년 3600억원 이익 냈던 회사가 코로나 이후인 2021년 2조4000억원의 이익을 냅니다. 2년 새 이익이 6.5배나 폭증해요. 영업이익률은 28%까지 치솟아요. 그 전에는 10%도 안 됐는데. 100원짜리 팔면 28원이나 남았다는 얘깁니다. 이듬해인 2022년에는 2021년 만큼 많이 벌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익이 1조원을 넘겼으니, 정말 야무지게 장사를 잘 했습니다.
이렇게 떼돈 벌면 하고 싶은 게 많을 것 같아요. 제가 박찬구 회장이라면 형한테 복수하고 싶은 맘도 생길 것 같아요. 물리적인 복수가 아니라. 가령 형이 가져간, 그런데 지금은 남에게 넘어 간 아시아나항공, 금호타이어 같은 회사들부터 사올 것 같아요. 금호아시아나의 왕가를 재건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박찬구 회장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격이 좀 꼼꼼하다고 했잖아요. 바꿔 말하면 보수적이다. 모험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박찬구 회장은 기존에 하던 사업인 화학 공장, 이걸 더 키우는 데 번 돈을 주로 씁니다. 하던거나 잘 하자. 금호석유 사업 계획에 설비 증설이 줄줄이 잡혀 있는 것을 볼수 있어요. 아까 얘기한 NB라텍스도 기존에 연 71만톤 생산하던 것을 95만톤까지 곧 늘릴 예정에요. 장기적으론 130만톤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이 있습니다. 100% 자회사인 금호피앤비화학 증설도 엄청나게 하고 있죠. 또 금호미쓰이화학, 금호폴리켐 같은 자회사들의 증설도 줄줄이 잡혀 있습니다.
아, 딱 하나. 예전 금호아시아나그룹 계열사 중에 산 게 있습니다. 금호리조트를 샀어요. 리조트가 대단히 돈 되는 사업은 아닌데요. 박찬구 회장이 골프를 좋아해서 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금호리조트가 아시아나CC를 갖고 있거든요.
이것 때문에 주주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죠. 연관사업도 아닌데 왜 회삿돈 낭비하냐는겁니다. 그런데, 이 리조트가 작년에 매출이 전년 대비 40% 가량 증가해서 1000억원 가까이 했고. 영업이익도 87억원이나 나서 오히려 인수하길 잘했다, 이런 평가도 지금 나와요. 금호리조트가 전국에 콘도 네 곳을 운영하는데 전부 리모델링 해서 꽤 괜찮다고 합니다. 또 캠핑장도 충남 아산에 새로 열었다고 해요.
금호석유, 이렇게만 보면 고민이 없을 것 같은데. 고민은 사실 무진장 있습니다. 우선 업황이 안좋아요. 금호석유 매출 구성 가운데 가장 큰 게 합성고무인데요. 비중이 33%나 하죠.
떼돈 벌어다 준 NB라텍스도 합성고무에 속해요. 그런데 이 시장이 요즘 안 좋습니다. 톤당 2000달러 넘었던 NB라텍스는 지금 1000달러 밑에서 회복이 안되고 있어요. 요즘 사람들 코로나 신경 잘 안 쓰잖아요. 마스크도 안 쓰는데, 장갑은 더 안 끼겠죠. 라텍스 장갑 시장 규모가 지난해 20% 넘게 감소합니다. NB라텍스 공장 더 키워놨는데, 공장 놀리게 생겼어요.
합성고무 사업의 또 다른 주력제품 SBR. 자동차 타이어 원료로 많이 씁니다. 사실 금호석유 원래 사업이 이거였어요. 금호타이어에 원료 납품하는거. 그런데 이 시장도 좋진 않아요. 물가 잡겠다고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잔뜩 올려놔서, 소비자들이 차 사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차 살 때 할부나 캐피털 많이 쓰잖아요. 이거 금리가 요즘 아무리 낮아도 5%, 높으면 10%를 넘어가요. 차 잘 안 팔리면, 타이어 잘 안 팔릴거고, 그럼 타이어 소재 만드는 금호석유 같은 회사에 당연히 안 좋을 겁니다.
금호석유는 타이어 뿐만 아니라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소재를 많이 만들어요. 그래서 자동차 경기에 민감하죠. 자회사 금호폴리켐이 하는 EPDM이란 특수 합성고무가 있는데, 이것도 타이어 튜브나 호스 같은데 쓰이죠. 회사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 적지 않아요.
또 매출 비중 18%를 차지하는 합성수지, 쉽게 말해 플라스틱 분야도 자동차 연관 산업이에요. 또 우리가 독극물로만 생각하는 페놀. 이 페놀이 플라스틱이나 나일론, 세제 같은 제품에 반드시 필요한 물질인데요. 그래서 경기에 매우매우 영향을 받죠. 경기 침체가 오면 타격을 많이 받습니다. 금호석유의 페놀 매출 비중이 29%나 하니까, 이 시장도 엄청 중요해요.
페놀 수요가 줄고 가격도 떨어져서 매출, 이익이 뚝뚝 감소하고 있습니다. 2022년 1분기 1600억원이나 이익을 냈던 게 2023년 1분기 100억원 수준으로 급감했습니다.
또 하나 고민은 경영권 분쟁이죠. 박찬구 회장이 형하고 싸운 뒤에 금호석유를 가지고 나온 것이라 지분 구조가 취약해요. 2022년말 기준, 박찬구 회장 지분이 7%도 안 되고, 아들 박준경 사장 지분이 7.45%. 여기에 딸 박주형 부사장 지분이 1% 수준입니다. 다 더해도 15.4% 밖에 안되죠.
그런데, 여기 한 명이 더 있어요. 박찬구 회장의 둘째 형이 박정구 회장이라고 했잖아요. 그의 막내아들 박철완 전 상무가 8.87%나 들고 있습니다.
박철완 전 상무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나와서 보스턴컨설팅그룹에 근무한 수재인데요.2011년 금호석유에 들어온 뒤에 형제의 난을 지켜보고 현재 숙부인 박찬구 회장과 사이가 틀어져 있습니다. 2021년 박철완 전 상무는 회사에서 나갔습니다. 이후에 매년 주주제안을 하면서 회사 경영이 잘못됐다고 비판하고 있죠. 언론에선 '조카의 난'이라고 불렀습니다.
박찬구 회장 지분이 취약하다 보니까, 금호석유는 주주 정책에 상당한 신경을 씁니다. 다른 주주들, 특히 기관 투자가들이 박찬구 회장을 지지하도록 해야 하니까요. 기관이 좋아하는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이런거 엄청 합니다. 금호석유의 연말 배당액이 한 주에 2017년 800원 했는데. 이게 지난해 5400원까지 늘었어요. 앞으로 3년 간 이익의 최대 25%를 배당으로 쓰겠다고 해요.
또 이익의 최대 10%는 자사주를 사서 소각할 예정입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주식수가 감소해서 주당 순이익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대주주의 지분율이 올라가는 효과도 있어요. 회사 전체 주식이 200주인데, 20주 가진 대주주가 있다면. 지분율은 10% 잖아요. 그런데 회사가 자사주로 100주를 사들여서 이걸 다 없애버린다면. 20주 가진 주주의 지분율은 20%로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자사주 소각은 박찬구 회장의 경영권 강화에도 좋은겁니다. 실제로 금호석유는 작년 9월에 1500억원어치, 올 3월에 1000억원어치의 자사주를 태워버리겠다고 발표한 바 있어요. 현재 금호석유가 보유한 자사주는 무려 17.9%나 합니다.
이 자사주 딴데 넘기면 백기사, 우호지분 되는 것이고. 그냥 다 소각하면 대주주 지분이 엄청나게 올라가요.
금호석유 내부에 현금으로 가진 것만 2023년 3월말 기준 5000억원이 넘으니, 주가가 떨어지면 자사주 더 살 가능성도 높습니다.
금호는 과거에 호남을 대표하는 대기업이었고. 호남 사람들엔 긍지와 같은 회사였죠. 삼성의 이병철, LG의 구인회, 롯데의 신격호. 한국 굴지의 대기업 창업주 대부분이 영남 분들이어서 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금호가 다시 살아나길 기대하는 분들, 꼭 호남 사람 아니어도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금호석유가 다행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부디 금호그룹의 부활을 이끌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집안 싸움도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금호석유화학, 금호 왕가 재건할 수 있을 지 눈여겨 보겠어.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