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배출 3단계 '억제-중립-감축',,,현실은 억제조차 불가능
친환경차, 특히 배터리 전기차가 화두다. 이를 통해 탄소 배출 없는 이동 사회를 만들겠다는 게 인류의 목표다. 하지만 잉여 생산, 잉여 소비에 기반한 사회 구조를 감안할 때 탄소 배출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억제로 시작해 차츰 중립과 감축으로 가자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현실은 환경과 크게 다르다. 중립은커녕 억제조차 어렵다. 탄소 배출 억제가 곧 성장의 멈춤을 의미하는 탓이다. 그래서 ‘지속성장’은 그럴싸한 허울로 포장된 탄소 배출의 위선적 표현이다.
성장의 대표 사례는 인구 증가다.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80억명의 글로벌 인구는 오는 2070년 103억명이 된다. 자원을 소비해야 할 인구가 20억명 늘어난다는 의미다. 인구 증가는 이들이 추가로 섭취해야 할 식량 증산을 수반해야 한다.
여기서 논쟁이 벌어진다. 1700년대 중반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멜서스는 인구 증가를 식량 증산이 따라잡지 못해 인류는 빈곤 속에 허덕이다가 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물론 그의 예측은 빗나갔다.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했음에도 곡물 생산 기술이 발전하고 무역의 발달로 식량 교류가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서스 시대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경제학자 인두르 고클라니는 인구 증가에도 1인당 칼로리 공급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이른바 농업 집약화와 남는 식량을 부족한 곳에 보내는 물류 시스템의 발전 덕분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식량의 탄소 발자국이 남는다. 남미에서 재배된 특정 식품을 배와 항공기에 실어 부족한 곳으로 이동시킬 때 탄소를 배출한다. 이동의 동력원이 화석연료인 탓이다.
그래서 가급적 로컬 푸드 섭취를 권고한다. 이동 거리를 줄여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자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의 식욕을 충족시키려면 다양한 음식이 한정된 지역 내에서 재배 또는 길러져야 하는데 이 경우 대량 생산의 경제성이 떨어져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다. 멀리서 오는 식량의 물류비를 배제하면 경제성을 맞출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기서 전제는 ‘친환경’이다. 소량과 대량 생산 모두 친환경으로 재배가 전제될 때 비용은 소량 생산이 더 오르고 물류비용은 대량 이동이어서 오히려 낮아진다.
동시에 로컬 푸드가 확대되면 식량의 이동이 필요 없어 물류 산업 규모가 축소되고 해당 분야의 일자리는 감소한다. 이는 '지속 성장'이라는 본질적 목표를 저해하는 것이자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인간의 욕망을 강제로 억제하는 일이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거나 때로는 비싸게 사야 할 때 인간은 욕망을 충족하지 못해 분노를 표출하며 대상은 정치를 향하게 된다. 동시에 환경을 위해 과잉 소비를 제어하는 것은 기업의 본질적 성장 활동 축소를 의미한다. 따라서 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남들보다 잘 먹겠다는 매우 기초적인 욕망 억제를 모두가 인식하고 동의할 때 흔히 말하는 탄소 '억제'도 가능한 구조다.
흔히 탄소 감축의 3단계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억제-중립-감축'은 매우 어려운 과제다. 먼저 '억제'는 현재 물건을 100개 만들 때 1개당 탄소 배출량이 1g이라면 앞으로도 물건의 총량과 무관하게 탄소 배출은 1개당 1g을 유지하라는 뜻이다. 성장을 위해 추가로 100개 생산을 원하면 200g에 맞추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립은 100개 생산에 100g의 탄소를 200개 생산에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니 엄밀하게는 개당 탄소 배출량을 0.5g으로 줄이는 것과 같다. 감축은 100개 생산에 탄소는 50g만 배출하는 기준이다. 따라서 감축 단계에서 200개 생산을 목표로 한다면 개당 탄소 배출량은 0.25g에 맞춰야 한다. 제 아무리 탄소 배출을 줄여도 1개 생산에 1g인 현재 수준에서 중립은 0.5g, 감축은 0.25g을 제안한다.
당연히 생산 비용에 부담을 느낀 기업은 100개 생산에 머물거나 아니면 200개 생산에 필요한 탄소 감축 비용을 제품에 반영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 결과 소비자는 평소보다 비싼 가격을 감내해야 하는데 여기서 저렴한 제품을 원하는 본질적 욕망과 환경을 고려하는 사회적 인식은 또 다시 충돌한다. 게다가 경제적 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생계에 미치는 영향은 훨씬 크다. 해결책을 위해 국가는 생계에 세금을 투입하고 재원 확보를 위해 세금 부과 항목을 추가하거나 세율을 높일 수밖에 없고 부메랑은 다시 국민 전체 부담으로 돌아간다. 친환경 물건을 구매할 때 경제적 부담이 늘고 모두의 친환경을 위해 세금을 더 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친환경의 경제적 본질이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준비가 충분히 돼 있는가? 정치인은 친환경에 따른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알면서도 후대를 위해 강력한 정책을 도입할 수 있는가? 인간은 생존 및 심리적 욕망을 억제하며 살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친환경은 점진적 전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점진적 전환은 기후위기를 더 심각하게 만들 것이고 그때마다 논쟁은 인간이 진정 욕망을 억제할 수 있을까에 모아지기 마련이다. 욕망은 본능이고 친환경은 이성에 기반하고 있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능과 이성 사이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선택은 이성에 기반한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배터리 전기차가 사용하는 전기 에너지에 유류세 만큼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다르지 않다. 전기차 확대로 유류세가 줄어들면 친환경에 투입할 국가 재원이 부족해지는 탓이다. 이런 이유로 전기차 충전요금에 ㎾당 500원의 세금을 부과했을 때 친환경을 이유로 사람들은 배터리 전기차를 살까? 결국 중요한 것은 모두의 인식 전환이다. 기꺼이 친환경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준비가 돼야 한다는 의미다.
박재용(자동차 칼럼니스트, 공학박사)